시대를 앞서가는 천공스승의 '정법강의' [시리즈 제 2편]
  • 하태곤기자
  • 승인 2022.04.18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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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공스승과 정법강의의 비밀

심층기획 특집

 

 

 

 

 

 

 

 

 



정법강의는 바로 홍익사상에 바탕을 둔 ‘삶의 지침서’
비밀의 열쇠는 우주대자연의 원리 홍익사상에 담겨있다

정법강의를 폄하하는 일부 세상의 인식
그것은 편견, 수십 번을 들어야만 비로소 ‘이해’

홍익사상은 한국인만 모르는 “한국의 보물”
홍익정신은 대한민국 건국이념이자 우리민족의 철학

‘세상을 널리 이롭게’ 그것이 곧 “홍익사상”
스승의 설법은 깊이와 질량을 알아야만 비로소 ‘공감’

‘홍익인간 인성교육’이 무속이고 주술이라면,
‘우리가 우리를 부인하는 꼴’ ‘정법강의’에 그 답이 있다.

 

시국이 어수선하다.
코로나는 진화를 거듭하면서 변이로 거듭나고 있고, 나라 안팎으로는 역대급 비호감이라는 제 20대 대선을 끝내고, 박빙의 승부로 윤석열 당선자의 새 정부 출범을 목전에 두고 있다. 그러나 최근 윤 당선자의 용산으로의 대통령 집무실 이전을 앞두고, 설왕설래 말도 많고 탈도 많다. 코로나에 어수선한 시국까지 국민들은 이래저래 피로감으로 하루하루 속앓이를 하고 있는  형국이다.

나라 밖의 사정 또한 심상치 않다. 한마디로 난세의 형국이다.  러시아의 우쿠라이나 침공에 이어, 최근에는 부차 민간인 대학살까지, 지구촌이 온통 충격의 도가니로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여기에 북한은 연일 선제타격 운운하며, 대한민국의 국가안보를 위기에 몰아넣고 있고, 이래저래 안으로 밖으로 난세의 영웅이 필요한 시국이다.
에디터 – 하태곤 (weeeklywomankorea@naver.com)


두서없이 필자가 돌팔매질을 각오하면서 이글에 임하는 이유가 있다. 편견으로 가득한 우리사회의 그릇된 시선을 바로잡기 위해서다.  조금 더 표현을 강조하자면, 편견이 지배하고 있는 우리사회의 그릇된 모순에, 최소한의 방어적 표현으로 편견에 저항하기 위한 작은 몸부림이자 대항이다.

천공스승, 그는 누구인가!
그리고 스승의 정법강의,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필자는 아직도 천공스승 그가 누구인지는 관심 밖이다. 스승을 미화할 이유도 없고, 그렇다고 우리사회의 그릇된 시각에 사로잡혀 필자까지 그들의 편견에 힘을 보탤 이유도 없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스승을 바라보는 세상의 인식이 다소 편견에 치우쳐 있다는 사실이다.  그 편견만큼은 제대로 바로잡기 위해 역 편견으로 이글에 임하고 있다.   대부분의 언론과 주류 매체들은 20대 대선 과정에서 등장한 천공스승을 호기심 내지는 가십거리 인물로 다루고, 스승의 정법강의에 대해서도 다소 편향적인 시각으로 다루며, 황당하고 궤변이라고까지 폄하하는 등 심지어는 인격적 모멸감까지 표현하며 펜이라는 칼로 스승과 스승의 ‘정법강의’에 대해 비하도 부족해, 무속, 주술, 역술가로까지 묘사하며, 저잣거리에서 나물 씹듯, 비판적 평론으로 우리사회를 갈라치기 하고 있다.

뿐만이 아니다. 편견도 모자라, 사이비니, 무속이니, 주술이니, 도사니 하면서 수준 낮은 기사로 독자들의 호기심 자극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물론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편견으로 보면 편견으로 보일 것이고, 정법으로 보면 정법으로 보일 터,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스승을 따르고, 스승의 정법강의를 듣고 있는 회원 수가 얼추 짐작해도 국내외적으로 백만 명 이상 상회하는 것은 어찌보면 편견으로 가득한 세상에 대한 항변이자, 스승을 따르고 존경하는 회원들의 응원과 박수의 외침인지도 모른다.

선풍적이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진심으로 스승을 따르고 존경한다. 맹신이 아니라, 신뢰와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몇십 번, 몇백 번을 듣고서야 비로소 ‘공감’했기에 그 누가 뭐라 하던, 그들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스승에 대한 굳건한 믿음과 그 믿음의 바탕에는 스승으로부터 단순한 인생철학 강의를 듣는 것이 아니라, ‘홍익인간 인성교육’이라는 대의명분에 모두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속 논란’은 이번 대선의 주요 쟁점 중 하나였다.  상대를 곤경에 빠뜨리고자 네거티브의 가장 완벽한 소재로 ‘무속 논란’을 부추겼고, 그 대상으로 스승을 정치판으로 끌어들여, 그들의 입맛에 맞게 각색하고 짜깁기하여 스승에 대한 인격적 모독까지 서슴지 않았다.  선입견은 편견에 또 다른 편견을 양산하는 등 스승을 한낮 무속인, 역술인으로 묘사하기 일쑤였다. 비록 역설적으로는 천공이라는 이름을 널리 세상 밖으로 알리는 노이즈 마케팅(?)의 효과가 나타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의 잘못된 인식에 대한 결과물로 오히려 스승의 정법강의를 듣고자 회원 수가 증가하는 현상을 보이기도 했다.

정법강의, 들으면 들을수록 중독성
반전을 통해, 어느 한 순간 아! 그렇구나! 하고 ‘공감’

무엇보다 스승의 정법강의에는 ‘홍익인간 인성교육’이라는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이자 우리민족 뿌리의 혼이 담겨져 있다. 대다수는 처음에는 단순 사이비라는 생각에 거부감이 들기도 하지만, 묘하게도 스승의 정법강의는 들으면 들을수록 매우 강한 중독성이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가정, 학교, 종교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어찌 보면 쉬운 듯하면서도, 또한 어찌 보면 당연한 논리로 문득 문득 반전을 거듭하는 것이 정법강의의 특징이다.

특히 스승의 정법강의는 통찰력과 동시에 아무도 예기치 못하는 역발상, 그리고 반전, 아울러 일상적이며 평범한 모든 문제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며, 그 해결점까지 알려주고 있어, 실질적으로 일상생활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 그것이 바로 정법강의의 본질이다.

스승의 중독성 있는 강의에 대해 인문학 평론가들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 채널러(Chan neler)라고도 표현한다. 일반적으로 채널러는 영계 혹은 외계인이나 다른 차원의 존재와 텔레파시 등으로 교신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일컫는다. 그들은 보통 미래에 대해 예언을 하거나 특별한 메시지들을 받아서 세상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영적인 주제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것들에 기겁을 하며 거부감을 보이기도 하지만, 스승의 정법강의는 마치 최면을 걸 듯, 덫에 걸 듯, 스승의 메시지에 빠지게 만드는 힘이 아주 강하다.

물론 일부에서는 이러한 스승의 강의에 어떤 모종의 숨겨진 메시지가 담겨있는 것은 아닌지, 가끔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그러나 스승의 정법강의에는 오히려 무속을 타파하고, 기복적 신앙을 기피하며, 특별히 주술적이지도 않다. 그리고 일반인들이 단 한번 들어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고, 몇 번을 엄중하게 들어야만 비로소 공감할 수 있는 매우 장엄하고 심오한 뜻이 담겨져 있다. 필자의 경험도 그 예의 한 범주에 속한다.

처음 스승의 정법강의를 접했을 때, 사실은 실망이었다. 그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말들, 그리고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들, 단 몇 분 듣기에도 지루했고, 식상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판단이었는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느낄 수 있었다. 다행히 “몇번은 들어봐야”겠다는 중독성은 있기에 그것을 빌미로 반복에 반복을 거듭, 또 다른 동영상까지, 그 결과 놀라운 현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최근 불거진 용산으로의 대통령 집무실 이전과 관련한 내용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스승은 이미 3년 전, 용산의 활용방안과 쓰임새에 대해 정법강의를 통해 설법한 바가 있고, 시대를 앞서가는 혜안의 지혜와 우주대자연의 원리, 그리고 그 비밀의 열쇠가 강의의 내용에 담겨져 있다. 당시 스승의 강의에는 “용산에는 용이 와야 힘을 쓴다. 그냥 오면 쓸모없다. 여의주를 들고 와야 한다. 용은 사람이고, 여의주는 곧 법(法)이다”라고 표현한 바 있다.

이처럼 최소한 3년 전, 시대를 내다보는 스승의 정법강의에 대해서 당시 대다수는 난생 처음 듣는 터무니없는 소리라며 어리둥절했을 것이고,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냉소적 반응까지도 보였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홍익인간 인성교육’을 통해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고자 하는 스승의 ‘정법강의’에대한 특징이자, 본질이다.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라!
정법강의는 곧 ‘홍익인간 인성교육’

스승의 정법강의에는 또 다른 반전이 담겨져 있다. 새삼 춘천의 모 스님의 말이 떠오른다. 스승의 정법강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두 번 들어서는 이해불가, 최소한 몇십 번은 반복해서 들어야 비로소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충고해준 바가 있다. 또한 스승의 정법강의에 대한 비밀의 열쇠는 스승의 유일한 제자 신경애 원장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신 원장과 대화를 하다 보면 늘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게 되고, 결과는 오랜 여운으로 남는다. 일반인들은 도무지 범접할 수 없는 생각의 깊이와 말의 질량과 에너지, 그리고 상대의 마음을 읽는 지혜와 대인적 기개가 충만해 있다.

그러다 보니, 누구라도, 아무리 강단이 있는 사람이라도 신 원장과 담소를 나누다 보면, 겸손과 예의를 깨닫게 해준다.  그 자신 지금에 이르기까지는 스승으로부터 20년 공부와 수행의 과정, 그리고 그 모든 진리와 답이 스승의 정법강의에 담겨져 있음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사실은 스승으로부터 배운 제자의 학(學)과 스승을 잇는 계보의 맥을 가히 짐작케 한다.

스승은 한때, 세속의 오탁악세(五濁惡世)에 대항하는 납자(衲子)이기도 했다. 풍랑의 파도를 헤치며, 세월은 그렇게 흘렀고, 그러나 그 과정은 깨달음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는 결국 밤과 낮을 넘나들며, 알 수 없는 화현에 끌려,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고, 마침내 유·불·선의 경계까지도 타파하게 되는데, 전자에도 밝혔듯이 필자는 스승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있다.

그 인연의 시작은 춘천에 주석하고 있는 모 스님이었다.  스님은 뼈대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세상사 부질없음을 깨닫고, 어린 나이에 동진 출가한 종단의 선승(禪僧)으로 한때는 숱한 안거를 성만하며, 절개가 충만했던 스님이었다.  숱한 화두를 참관했던 스님이 천공스승에게 진심어린 존경심을 표할 때, 필자또한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그렇게 스승을 친견하게 된 것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세월을 돌려 스승의 어린 시절은 대구로 거슬러 올라간다.  태어나 4세 때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고 부산의 감천동 고아원에서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내며, 신문팔이, 구두닦이, 껌팔이 등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스승의 학력 또한 초등학교 2학년이 최종 학력이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스승은 볼품없는 유년기와 청년기를 거치며, 속세에서 방랑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세상은 스승에게 그리 만만치가 않았던 모양이다. 배신과 배반의 판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에 결국 스승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승과의 이별이었다. 극단적 선택이야말로 스승에게는 유일한 탈출구라 믿고, 죽기전 이 땅의 산맥이나 한번 둘러나 보고 가려고 신불산에 올랐다가 우연히 어떤 보살과의 인연으로 용맹 정진 수행에 들어가, 해탈의 긴 항해를 시작하기에 이른다. 그리고는 스승은 천지 대자연 앞에 무릎을 꿇고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이후, 숱한 고뇌와 번뇌의 망상에 대항하며, 산에 버려진 쓰레기를 치우면서 묵언과 고난의 수행으로 산에 버려진 음식들을 주워 먹으며, 세상의 모순과 의문을 풀어내기 위해, 묵언 수행을 이어갔다. 그리고는 고해성사와 참회 정진을 통해 마침내 회광반조(回光返照)로 거듭나니, 비로소 우주대자연의 원리와 이치를 깨닫게 되고, 마침내 인간과 신의 경계를 넘나들며 해탈의 경계에 이르게 된다.

편견으로 얼룩진 스승의 정법강의,
편견으로 보면 편견, 정법으로 보면 비로소 ‘공감’

우려하건데, 굳이 스승을 신격화하고 미화하는 것은 아니다. 그럴 이유도 없다. 있는 그대로 보고, 느껴지는 그대로 표현하자면, 신과 인간의 경계를 넘나들며, ‘홍익인간 인성교육’을 통해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라!’는 홍익사상의 실천가, 또는 그 이상의 이념적 사상가로 시대를 앞서가는 ‘정법시대’의 창시자로 봄이 타당할 듯하다.

특히 스승의 정법(正法) 강의는 우주대자연의 법칙과 이치를 인용하여 홍익인간을 기반으로 한 정법의 도를 설파하며 진정한 삶의 가치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홍익인간 인성교육’에 바탕을 둔 정법강의에 대한 좀 더 정확한 구체적인 본질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무속인도 아니고 역술인도 아니다. 사이비 교주와도 거리가 멀다. 일각에서 주장하는 호기심과 자극을 불러일으키는 가십거리의 대상 인물은 결코 아니다. 우주 대자연의 이치와 원리를 깨닫고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고자 하는 굳은 신념으로,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을 묵묵히 실천하고 있는 난세(亂世)의 지도자일 뿐, 굳이 종교적으로 표현하자면 시대의 선지식이자, 깨달음의 수행자, 스승이라는 호칭이 그에 대한 예우이자 적절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홍익인간 인성교육’을 통해 홍익사상을 실천하고자 하는 시대의 스승과 스승의 정법강의를 다짜고짜 편견으로 매도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우리 민족의 정서를 대변하고 있는 홍익사상은 종교와 신념을 초월해 세계가 인정하고있는 우리 민족 고유의 철학이다. 우리가 우리의 조상 단군을 섬기고 경외하는 것이 사이비이고 무속일 리는 없다. 설령 그것이 무속일지라도 우리 민족 고유의 샤머니즘을 무작정 미신이나 무속으로 터부시해서도 안된다. 그렇게 보는 시각자체가 편견이다.

편견은 기득권 세력이 만든 일종의 압력이나 다름없다. 누가 무슨 자격으로 무슨 판단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누구에게도 그럴 권리는 없다.  오히려 스승은 누군가를 섬기고 숭상하는 것조차 배타적이라며, 기복적 신앙과도 거리를 둔다. 주술적 행위도 철저히 금하고 있고, 오직 혜안의 지혜로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고자 바른 정법 시대를 열겠다는 것이 스승의 지론이고, 그를 따르고 존경하는 이들의 그에 대한 총체적인 평이다.

국가와 민족을 위하고 ‘세상을 널리 이롭게’
정법(正法)강의로 이 시대 꼭 필요한 진정한 홍익멘토

주술적 인물이 아닌
시대의 선지식이자  스승으로 존경받아야

최근 대선과정에서 불거진 스승과 스승의 정법강의에 대해서 촌평이 난무했다. 주술, 역술, 무속과 같은 현상들은 분명 넓은 의미에서 종교적이지만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종교라는 개념에 딱 들어맞지는 않는다.

그러나 통속적인 종교 개념은 대단히 협소해서 ‘정상적’인 제도종교에서 일탈한 무언가가 교단 비슷한 조직을 갖추고 있으면 ‘사이비’가 되고, 그런것 조차 없으면 ‘미신’이라 분류된다. 그러다 보니 정치인들의 활동에는 종교적 자유와 관련하여, 몇 가지 암묵적인 제약이 걸려 있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무속’이라는 말은 다소 애매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무속을 엄밀하게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무당이라는 종교전문인이 개입되지 않은 현상들까지 무속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그러나 종교와 미신에 대한 근대적 구분이 도입된 이래, 무속은 종종 한국의 미신 영역을 대표하는 표상으로 취급되어왔다. 무속이라는 말 대신 ‘무교’라는 독립된 종교로 불러야 한다는 등의 대안 담론들이 꾸준히 제기되어왔지만, 여전히 한국 사회의 공적 논의에서 무속과 미신은 호환 가능한 개념으로 남아 있다.

스승의 정법강의에 대한 본질은 무엇인가!
답은 간단하다. ‘홍익인간 인성교육’이 바로 그 바탕위에 있다. 이념은 우리민족의 시조, 고조선의 건국이념으로 대한민국 교육의 기본 이념이기도 하다. 홍익인간은 흔히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로 해석되지만, 좀 더 들어가면 “인간을 크게 도우라”는 의미가 된다. 스승의 정법강의가 바로 그것이다. 인간을 모든 가치에서 앞세우는 사상, 그러한 사상이 스승의 정법강의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의 건국의 이념이 다소 추상적이고 사실이 아닌 신화 속에서 거론된다는 것을 이유로, 홍익인간을 교육이념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려는 시도가 기독교를 비롯한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계속되어 왔다. 그러나 홍익인간은 여전히 교육이념의 지위를 지키고 있으며, 한국의 교육과 정치를 반성하고 문명과 윤리를 비판하는 가치이자 이념으로 지속적으로 호명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천공스승이 윤석열 대통령 당선을 정확히 예측 한것은
역술이나 주술이 아닌, 우주대자연의 원리와 법칙에 따른 것!
누구라도 스승의 ‘정법강의’에는 자신이 찾고자 하는 해답이 있다.

한편, 스승의 정법 강의에는 국가와 민족을 위한 미래 예측도 담겨져 있다. 특히 스승은 강의를 통해 적시적소 위기의 대한민국을 언급하며, 정치 지도자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도 던지고 있다. 이를테면 윤 당선자를 향해서 언급한 내용이 대표적이다. 주요 발언을 보면 과거 윤당선자가 검찰총장 시절 윤 총장은 ‘별의 순간’에 와 있다. 윤 총장은 국민을 위해서 일해야 한다. 사회 어른들을 두루두루 찾아뵙고, 그분들의 고견을 듣고, 좌파 우파 할 것 없이 고견을 들어야 한다.
(지난해 4월 5일 정법강의)

또한, 현 집권 정부에 대해서도 스승은 정법강의를 통해 “정권을 5년 잡아서 누렸다가 끝났으면, 굴복할 건 굴복하고, ‘우리가 잘못했으니 정권을 내어줘야 하는구나’ 하면서 따라가야 한다. 반항하면 더 힘들어진다.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이, 기업을 한다는 사람들이 누명을 썼든 어떻게 됐든 판결을 해주면 들어가서 이럴 때 쉬어야겠다고 생각해야 한다.”
(지난 2월 25일 정법강의)

한편, 스승은 윤 당선자의 부인 김건희 여사에대한 조언도 있었다. 김건희여사는 같이 뛰고, 나서는 걸 좋아할 게 아니고 내조가 필요하다. 스크린 내조가 필요하다. 신문도 보고, 잡지도 보고, 사회가 어떻게 굴러가는가를 보면서 스크랩을 해서(윤 후보가)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뒷받침을 해줘야 한다. 이것만 딱하면 된다. 나가서 발로 뛰고 악수한다고 국민한테 도움이 되는 건 아니다. 윤 당선자가 대통령 되고 나서 영부인으로서 나오면 된다. 지금 현재로는 윤 당선자만큼 희망적인 사람은 없다. “반드시 윤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될 것이다”
(지난해 11월 15일 정법강의)

 

서산대사, 사명대사 그리고 원효대사 등
역사적으로 수많은 고승들,
난세에 국가와 민족을 위해 진심어린 충고와 조언,
그들이 무속인이고, 주술가라면 천공스승도 무속인 또는 주술가

이미 스승은 윤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그렇게 정확하게 예측했지만, 그런 스승을 향해 다수의 편향적 매체들은 역술인 프레임을 씌워 스승을 냉소했다. 스승의 정법강의에 대해서도 시종일관 폄하한 채, 호기심과 자극적 기사로만 점철하기 일쑤였다. 오죽하면 윤 당선자의 캠프 윤희석 대변인까지 나서서 스승과 정법강의에 대해 “천공스승, 그분은 역술인이라고 얘기하긴 좀 어폐가 있다. 적어도 그분이 얘기하시는 것 중에 분명히 사리에 맞는 부분도 있다. 후보가 스승의 정법강의를 몇 번 봤다는 걸 가지고 미신이나 무속과 연결시키는 건 상당히 거리가 먼 얘기”라며, 일부의 주장에 대해 터무니없다고 선을 그은 바가 있다.

스승의 정법강의에는 정치 분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중년기의 외도, 바람직한 부부생활, 인간관계 등 일상생활 소재부터 경제문제 등 사회적 내용까지 망라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스승이 산에서 17년 동안 묵언 수행을 한 끝에 스스로 깨달은 ‘스승님’으로 부른다는 점, 흔한 ‘도사’와 같은 외모를 한 점 등을 거론하며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심지어는 러시아 제국 말기의 ‘괴승’ 라스푸틴에 빗대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당연히 어이가 없고, 편견이고,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역사적으로 충혼(忠魂)의 사명대사나 서산대사, 그리고 화합과 상생의 상징 원효대사 등 수많은 고승들과 멀리 삼국지에 등장하는 천하제일의 전략가 제갈공명 등 난세의 영웅들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구국의 일념으로 당대의 지도자들에게 조언과 충고로 국사(國師)의 역할을 해낸 일화가 많다. 그들 모두에게는 혜안의 지혜가 있었고, 그 지혜는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고 있는 당대의 지도자들에게는 힘과 용기를 북돋아주어 큰 도움이 되기에 충분했다.

따라서 천공스승과 스승의 정법강의를 터무니없이 러시아 제국의 ‘괴승’ 라스푸틴에 빗대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자, 일고의 가치도 없는 편견과 편향, 선입견에 사로잡힌 음모와 모략일 뿐, 터무니없는 음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