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미디 황제 고(故)이주일 선생 사망 19주기 관리비 못내 유골함 사라진 안타까운 사연 그 후?
  • 온라인뉴스팀
  • 승인 2021.10.15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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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 특별기획 [추모특집]

8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코미디의 황제 이주일.
당시 동양방송의 한 코미디 프로그램에 출연, 단 2주 만에 한국 코미디를 대표하는 초고속 스타로 떠올랐다.
“못생겨서 죄송합니다.”는 이주일을 대표하는 캐치프레이즈가 되었고 이는 부와도 연결, 그는 연예인 중 최초로 벤츠를 모는 사람이 되었다.
이 같은 인기에 힘입어 정계에도 진출, 92년 구리시에서 처음으로 국회의원에 출마, 당선되기도 했다.
그러나 늘 좋을 수만은 없는지 7대 독자인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는 슬픔을 겪었고 자신은 2001년 갑작스럽게 폐암 말기 진단을 받고 투병 중 2002년 61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 했다.
그가 떠나고 19년. 한때 연예계 최고 수입을 자랑할 만큼 재력가였던 그는 현재 납골당 관리비를 내지 못해 유골함이 사라진 상태다.
비석은 경매로 넘어갔고 고향인 춘천시는 사태를 알지 못한다고 답변했다.
그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본지가 심층 취재해 보았다.

 

65년 데뷔, 80년 방송 등장, 오랜 무명의 설움 겪어
본명 정주일, 지난 1940년 강원도 고성에서 출생했고 65년 샛별 악극단의 사회자로 연예계에 데뷔한 그는 1980년 동양방송에 얼굴을 드러내기까지 긴 무명의 설움을 겪었다. 익히 알려진 대로 박종환 축구 감독과 막역한 친구 사이였던 그는 춘천고 시절 축구선수로 뭔가를 보여 주고자 했다 한다. 유년시절에는 아버지가 좌익이라는 이유만으로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을 보내야 했기에 누구보다 꿈을 이루기 위해 고심했다고 전해진다.
61년 군에 입대해서 처음으로 희극배우 수업을 받았으며 제대 후 64년 서울로 올라와 연예인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의 첫 무대는 약장수들의 쇼 MC였다고.
유랑극단을 전전하며 정식으로 방송에 등장하기까지 생계를 걱정해야 할 만큼 긴 무명의 터널을 거쳤다. 자신을 딴따라라고 부르기보다 그저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가는 연예인이라고 불러주기를 소원했다던 그는 당시 연예인 중에서도 가장 인정받지 못하고 있던 코미디언의 위상을 끌어올린 장본이기도 했다.

 

“못생겨서 죄송합니다.”로 2주일 만에 벼락스타 돼 미인 아내와 결혼 그리고 고등학교 2학년생과 사랑에 빠지기도

그가 2002년 폐암으로 사망하자 방송계 선후배들을 비롯해 우리나라의 내노라하는 정치인들이 대거 조문을 했는데 그 중에는 자신의 방송출연을 금지시켰던 전두환 대통령도 있었다. 그만큼 그는 코미디언으로써 영향력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송해 선생은 고인을 “일그러진 표정, 비록 바보 같은 모습이라 해도 단 한사람이라도 웃길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던 사람”이라고 고인을 추모하기도 했었다.
본명 정주일이란 이름 대신에 이주일이란 예명을 사용하게 된 계기도 갑자기 벼락스타가 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처음 동양방송을 통해 브라운관에 얼굴을 알린 그는 출연 2주일 만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됐는데 이 때 이주일이란 이름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못생겨서 죄송합니다.”나 “콩나물 팍팍 무쳤냐.”는 그의 대표적인 트레이드마크. 사람들은 경쾌한 음악에 맞춰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던 그의 모습을 보고 배꼽을 잡고 웃기를 반복했다. 한시대 코미디를 주름잡던 황제가 된 까닭이다.
비단 그가 사람들을 웃겨서만 좋은 평가를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주위의 그에 대한 좋은 평가는 아마도 솔직함과 의리감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무명시절부터 자신을 물심양면으로 도와 무대에 설 수 있도록 그의 곁에서 평생의 매니저 역할을 했던 삼호프로덕션의 최봉호 회장에 대한 의리를 빼 놓을 수 없다. 후일 그가 사망하고 난 후 그의 장례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기도 했던 최봉호 회장은 그의 타계 후 사석에서 병원에서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고 제일 먼저 했던 말들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그가 가장 미안해했던 부분은 아내에게 잘해주지 못한 것이었다고. 미인이었던 아내를 콕 찍어 사랑해서 결혼했던 그는 결혼 후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며 무척이나 고생을 시켰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는 그토록 예쁜 아내와 결혼을 한지 1년도 안돼서 당시 고등학교 2학년 여학생과 사랑에 빠지며 아내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기기도 했다.
여자 문제는 비단 이것뿐만이 아니라 그의 회고록에도 자세히 나와 있지만 강릉 경포대 촬영 중에 얽힌 유명 탤런트와의 염문은 그의 아내가 이성을 잃게 할 정도로 마음에 상처를 안겨준 사건이었다. 후일 그 탤런트는 1년 동안 미국에 머무르며 이주일의 아내 제화자씨의 심정을 이해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여자 문제를 비교적 솔직하게 밝힌 것이 이채롭다.

 

 

저질스럽다는 이유로 방송출연 금지 당하기도
생계가 어려웠던 유랑극단의 사회자에서 코미디의 황제 자리에 오르기까지 2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연예계에서 숱한 어려움을 겪어왔던 그는 최고의 주가를 올리던 시기에 방송인들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출연금지 조치를 당하기도 했다. 이유는 저질스럽다는 것.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상의 이유일뿐 실상은 전두환 대통령과 닮았다는 이유에서였다고, 누구한테 하소연 할 수도 없었던 그는 생계를 위해 일하던 밤무대 업소에서 그 분을 달랬다고 한다.
그가 방송출연 금지 조치를 당하고 난 이후로 전두환 대통령과의 악연이 해소되었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주일이 세상을 떠난 다음날 전두환 대통령은 분향소를 찾았고 이주일이 화장하기로한 것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잘한 결정이라고 말하고 방송출연 금지조치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이 떠
났다고 한다.

그러나 전해진 얘기에 따르면 그는 전두환 대통령과 앙금을 해소한 것을 넘어 꽤 친하게 지냈던 듯하다. 88년 전두환 대통령이 백담사로 떠나고 89년 이주일이 친구 박종환 감독과 백담사를 찾아감으로써 빠르게 가까워졌다고.
방송 출연 금지조치에 대한 오해는 이보다 훨씬 오래 전인 83년 박종환 감독이 멕시코 청소년 축구 4강 신화를 쓰면서 막역한 친구 사이였던 두 사람을 불러 돈독한 우정을 칭찬한바있는데 이때 이주일은 전두환 대통령이 묻는 말을 듣고 오해를 푼 것으로 알려졌다. 전전 대통령이 왜 한동안 TV에 나오지 않았냐고 물어 봤던 것. 이 말을 듣고 이주일은 모든 일이 아랫사람 손에서 이루어진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고 오해를 풀게 되었다고.
이후 전전 대통령은 이주일의 아들을 잃은 슬픔을 위로했고 그가 암 투병 중일 때는 친히 그의 분당 집을 방문해 암을 불치병이 아니고 그 동안 국민들을 행복하게 웃게 해줬으니 반드시 쾌차할 것이라고 그를 위로했다고 한다.
아무튼 그는 흑백TV 채널이 3개 밖에 안 되던 시절, 국민들이 그가 출연한 프로에 심취할 정도로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당시 독재정권에 억눌러 있던 국민들은 그의 등장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했고 이주일의 뭔가 보여주겠단 멘트는 그를 한 순간 무명에서 최고의 스타반열에 올려놓았다.

 

사랑했던 7대 독자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는 아픔 겪어 92년 14대 국회의원을 정계 진출

2002년 당시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그에게는 무대가 삶 자체였다고 한다. 무대를 이토록 사랑했던 그였기에 91년 미치도록 사랑했던 아들 창원씨를 잃은 슬픔을 안고 3일 만에 다시 무대에 섰을 것이다. 오랫동안 코미디계에서 코미디 쇼를 발전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그는 폐암 말기 진단을 받고도 디너쇼를 강행하기 위해 연습을 하다 10분 만에 쓰러진적도 있었다고 한다.
평소 지론이 “코미디언이 웃음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그 어떤 괴로움도 참아내야 한다.”였기에 자신을 보고 큰 웃음을 짓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힘들어도 그 길을 걸어온 것을 자랑스러워했다고.
아들 얘기가 나오면 눈시울이 붉어지곤 했다는 그는 특히, 사랑했던 아들에게 큰 미안함을 안고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 직업이 당시에는 “딴따라”라고 불리던 연예인이어서 창원씨는 이런 아버지를 부끄럽게 여겨 생활기록부상에 아버지 직업을 항상 “상업”이라고 적을 만큼 감추고 싶어 했다고. 아버지가 출연하는쇼의 포스터가 동네에 붙은 날이면 그 자신이 몰래 누가 볼세라 찢곤 했다고 한다. 이런 아들이었기에 아들이 대학에 입학하고 난 후 당시 인기를 끌던 포니 승용차를 사달라고 했을 때 사주지는 못할망정 크게 호통을 쳤던 것을 후회했다고. 당시 조용필과 더불어 고소득 1위를 차지하고 있었을 만큼 막대한 수입을 올리고 있었던 그는 비록 자신은 벤츠를 몰았지만 자식의 앞날을 걱정해 건방진 생각하지 말고 버스 타고 다니라고 큰 야단을 쳤다고 한다. 그렇게 엄격하게만 키워온 아들이었기에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은 슬픔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컸다.
이런 아픔을 간직한 채 그는 92년 경기도 구리시에서 국민당 후보로 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정계에 진출했다. 정계 진출 후 활발한 의정활동을 펼치던 그는 96년 돌연 “코미디 공부 많이 하고 떠납니다.”라는 명언을 남기고 정계를 떠나 다시 무대에 복귀했다.

 

폐암진단 진단 후에도 많은 환우들에게 강한 삶의 의지 심어줘

지독하게 사랑했던 7대 독자 아들을 잃고 담배를 더 많이 피우게 됐다는 그는 2001년 11월 폐암 말기 진단을 받은 뒤 힘든 투병 생활을 해오면서도 금연 전도사로 활동하며 국민들 사이에서 금연 열풍신드롬을 불러오기도 했다. 평소 축구를 사랑했던 그는 2002년 한일 월드컵 개막전을 휠체어를 타고 관전하며 병마와 맞서 당당하게 싸우는 모습을 공개하기도 했다. 의사로부터 3개월 밖에 못산다는 말을 듣고 그는 의사에게 제발 월드컵만 보고 죽게 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결국 월드컵을 경기장에서 가서 봤고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독일 월드컵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코미디언이자 축구인으로 생을 마감했다.
국립암센터에서 투병하며 많은 환우들에게 삶의 희망과 의지를 심어 주던 그는 2002년 의사의 가족들에게 준비하라는 말을 들은 지 1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 눈을 감았다. 그의 나이 62세였다.
한국 코미디계 황제의 별세 소식은 평소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을 슬픔에 젖게 했다.
특히, 그를 누구보다 따르고 존경했던 엄용수 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참으로 큰 산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고 회고하며 “아마도 형님께서 자식을 잃은 슬픔과 정치활동을 하면서 받은 많은 스트레스와 술로 인해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주일 씨는 정계를 떠난 후에도 정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고 한다. 제주도에서 출마하기 위해 주소를 제주도로 이전하며 그곳에 농장도 사고 땅도 사고하면서 그곳 도민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불러주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서 술을 즐겨 마셨다고 했다. 몸을 무리하면서까지 했던 선거운동이 결국 건강 악화를 불러온 셈이어서 후배인 엄용수 씨는 그 당시만 생각하면 말리지 못한 것이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평소 술을 좋아해 의원시절 주례 약속을 잡아 놓고도 실수를 하는 통에 다소 이미지에 실추를 입기도 했었다는 그는 각종 경조사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늘 좋은 사람이기도 했다. 이렇듯 그에 대한 에피소드가 많을수록 빈자리가 크게 느껴져 후배들은 세월이 흘러도 그의 존재를 쉬이 잊을 수 없노라고 했다.
많은 선후배들이 그를 친형 따르듯 했기에 그를 떠나보내며 많은 이들이 하염없이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와 가장 절친했던 친구 박종환 감독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 병문안을 다녀온 후 자신도 않아 누웠다고 하는데 이는 가장 어려운 시기를 같이 겪으며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가까웠기에 유독 슬픔이 커서 그랬다고 전해진다.

 

관리비조차 못내 5년 전부터 사라진 유골함, 묘비는 경매로 넘어가고… 춘천시, 사실 아는 바 업고 기념관 건립도 계획 없다 밝혀

기자는 8월 달 고인을 따르고 존경했던 엄용수 씨를 만났다. 그 자리에서 이주일에 대한 안타까운 사연을 전해들을 수 있었는데 다름 아닌 이주일씨의 유해가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것. 그의 입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보다 이주일 씨를 존경했던 엄용수씨는 만나자마자 한국 사람들이 갖고 있는 문화 예술인들에 대한 정서에 대해 안타까움을 먼저 토로 했다. 일본과 중국은 유명 문화 예술인들이 유명을 달리하면 그에 대한 추모가 변함없이 이어지는데 한국은 유난히 쉽게 잊히고 돌아가신 분들에 대해 TV에서 방송하는 것을 꺼려해 볼 수 없는 것이 속상하다고 말했다. 고인을 추모하며 기리는 정신이 없는 문화가 애석할 뿐이라고.
유골함과 관련, 한 5년 전부터 간간히 들리던 소식이 결국 사실인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사실인즉슨, 이주일 씨가 활동하던 시절은 가차명 계좌가 불법이 아닌 시절이었고 따라서 새삼스럽게 국회의원에 출마한다고 해서 옮길 수도 없는 상황이서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시대에 맞게 그랬던 것처럼 이주일 씨 역시 많은 재산을 처남 명의로 해 놓았다고 한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암 판정을 받고 유명을 달리하면서 문제가 복잡해지게 되었다는 것. 처남을 믿었기에 사전에 어떤 조처도 해놓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그가 죽고 3개월 뒤에는 처남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재산은 온전히 처남의 아들이 상속을 받게 됐는데 이는 이주일씨의 아내 제화자씨와 두 딸들에게는 기가 막힌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많은 현금과 땅 그리고 건물 등이 모두 처남 아들 명의에서 하나도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 눈뜨고도 재산을 다 뺏긴 셈이 된 것이다.
재산에 욕심이 많았던 처남의 아들은 한 푼도 돌려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결국 노름으로 재산을 탕진함으로써 오늘날 같은 비극을 자초했다. 고인이 된 후 그의 유골은 춘천시의 가족묘지 공원에 안치 되었으나 수년간 관리비가 체납돼 독촉을 받아오다 도저히 감당이 안 되자 부인이 제화자씨가 유골함을 들고 사라지게 되었다. 관리비 부담이너무 커지자 이러한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 것이라고. 부인은 결국 화병을 얻게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한다.
비극은 비단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 대 한국 최고의 코미디 황제였던 그의 묘비는 경매 얘기가 나올 정도로 안타까운 상황에 놓여 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애초 그의 비석을 만들었던 채석장 인부들이 나중에 돈이 될 것같아 경매를 통해 그의 비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참으로 슬픈 얘기였다. 그를 따르고 존경했던 후배들이 부랴부랴 안타까운 사연을 전해 듣고 대책을 마련하고 있으나 유골함을 들고 사라진 부인의 행방을 찾지 못해 안타까워하고 있다. 아마도 부인이 기자들이 취재차 접근해 올 것을 꺼려해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또 많은 선후배들이 아타까운 상황을 알면서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것은 이것이 어디까지나 가족 간의 문제여서 조심스럽기 때문이라고.
그렇다면 이주일씨의 고양인 춘천시는 이 사실을 알고는 있을까.
기자는 담당자와 전화 통화 끝에 항간에 들리던 춘천시에서 이주일씨를 추모하기 위해 기념관을 건립하는 문제 등에 관해 얘기를 나눠봤으나 이는 사실무근인 것으로 밝혀졌다. 춘천시는 그의 유골함이 사라진 것도 모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향후 이주일 씨에 대한 어떤 구체적인 계획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고 추진 계획이 없다고 입장을 밝혔다.
누구보다 자식 사랑이 각별했다는 이주일 씨. 사랑했던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은 것도 모자라 각별했던 딸은 사위가 재산을 탕진한 끝에 이혼하는 슬픔을 겪었으며 본인 사후에는 유골함조차 편안히 잠들지 못하고 있어 주위의 큰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
현재 엄용수 씨를 비롯해 이경규, 강호동 씨 등 그를 따르고 존경했던 많은 선후배들이 뜻을 같이하며 뒤늦게나마 고인의 업적을 기리고 안타까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주일은 40살에 데뷔해 성공한 연예인으로 연예인 최초로 국민 훈장모란장을 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