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년 천상의 소리꾼, '국민명창' 김영임의 효(孝) 풀 스토리
  • 하태곤 편집국장
  • 승인 2019.11.05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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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엄했다. 장내는 애환이 깃든 환희의 도가니였고, 파노라마로 심금을 울린 감동의 드라마였다. 지난 5월 세종문화회관을 거쳐 10월 5일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에서 펼쳐진 47년 소리인생, 김영임의 효(孝)공연이 그랬다. 무엇이 그리도 애처로웠을까! 무엇이 그리도 가슴이 애절하여, 그녀의 회심곡, 소리동작 하나하나에 모두가 기립박수로 화답했을까! 만사제치고 달려간, 그 날 주말 오후, 하늘은 맑고 쾌청했다. 시대가 낳은 타고난 천상의 여인 소리꾼 김영임. 그래서일까! 만산홍엽(滿山紅葉)의 가을에서 만난 그녀의 공연에 대해 대부분의 혹자는 이렇게 평가한다. “국악은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로서 국악인 김영임의 존재는 특별히 예술보호차원의 의미마저 갖게 한다고...”


                                                                                                       대담 _ 본지 발행인 박영숙 (한국여성언론협회 총재)
                                                                                                       에디터 _ 총괄편집국장 하태곤

 

경위 바르고 단정한 성격을 가리켜 경중미인이라고 했던가! 누군가는 예순을 훌쩍 넘긴 지금도 녹슬지 않은 청음으로, 대중을 사로잡는다는 것은, 소리꾼에게 있어, 100년에 한두 명 나올까 말까한 독보적 소리보물이라 했다. 때로는 허스키한 탁성으로, 때로는 고음과 저음을 자유자재로 율동(律動)하며, 마디마디 소리에, 겹창으로 접목시킨 그녀의 회심곡은 들을수록 애처롭고 애절하여, 뭇 관객들의 눈시울을 붉게 만든다.

자그마한 몸매에서 터져 나오는 그녀의 경기민요 특유의 담백한 노래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애틋함이 스며있고, 정겨운 소리는 가락마다에 어머니에 대한 애절함 그리움이 담겨, 부르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온통 눈물바다를 이루게 한다. 그의 음색은 특히 중하청부에서 곱고 섬세하게 꺾어 올려치는 끝막음 소리가 일품이다. 은근한 가락에 후렴이 붙는 짧은 장절형식이 흥겨움을 더하여 지루감이 전혀 없다.

“백 살까지 산다면, 나는 백 살에도 무대에 설 것”

지난 5월 세종문화회관 공연을 마치고 10월 초, ‘김영임의 소리 효(孝)’ 인천문예회관 공연을 앞두고, 소회를 듣기 위해, 후학 양성의 터전인 그녀의 소리전수소를 찾았다. 한사코 인터뷰를 고사하는 겸손함에 지인의 소개가 한 몫을 했다. 이내 범부의 청(請)에 화답이 왔다. 차나 한 잔 하자는 전갈로 그녀와의 담소는 그렇게 성사가 되었다.

“콘서트를 시작한 지도 벌써 30년이 넘은 것 같습니다. 어떤 콘셉트를 갖고 공연을 할까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남편 이상해씨가 그동안 어른들께 많은 사랑을 받았으니, 효(孝)를 주제로 공연을 만드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했고, 그렇게 해서 마련된 것이 김영임의 소리 효(孝) 공연이지요!”

인천문예회관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굿 퍼포먼스라고 했다. “저희 공연이 따뜻하고 정감이 넘치는 시간이 바로 그 굿하는 시간”이라며, 다행히 많은 관객들이 가장 좋아하고, 많이 찾는다고 했다. 그녀의 공연을 보기 위해 휠체어에 부모님을 모시고 온 관객이 있는가 하면, 옷을 갈아입을 겨를도 없이 환자복을 입은 채, 어머니를 모시고 온 모습이 너무나도 감동적이었다고 했다. 또한 언젠가는 비가 오는 날, 장대비를 맞으면서까지, 아들이 어머니를 업고 오는 모습에 너무 가슴이 벅차,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회심곡’으로 각박한 세상에 효(孝)를 알리며, 약관의 나이 19세에 소리에 입문해, 지난 1974년 회심곡 완창 앨범으로 ‘국민명창’ 반열에 오른 소리꾼 김영임은 올해로 소리인생 47주년을 맞이했다. 요즘은 클래식, 록, 힙합, 댄스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이 넘치지만 그래도 우리의 피에 흐르는,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음악의 뿌리는 분명 국악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그녀는 주장한다. 자타가 공인하는 경기민요의 대가이자 ‘국민명창’으로 불리는 김영임은 소리에 입문한 지, 불과 1년 만에 ‘회심곡’으로 음반을 출시하면서 많은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어, 이후에는 스타 소리꾼으로 가냘픈 몸매에 단아한 외모, 거기에 심금을 울리는 소리로 좌중을 압도하며 승승장구했다.

“14세 때부터 고전무용을 했어요. 어릴 적부터 라디오에서 은방울자매, 이미자 선생님 등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춤추는 걸 좋아했지요! 그런데 집안에서 반대가 심해 고전무용을 하게 되었고, 무용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국악을 듣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그것이 저의 운명이었던 것 같아요. 창부타령, 한강수타령 등을 들으면서 세상에 저런 소리가 있나 온몸에 전율을 느낄 정도로 좋았어요. 그래서 저도 소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무용도 모자라 소리를 하고 싶다고 하니, 집안이 온통 발칵 뒤집어졌다고 한다. 당시에는 여자가 노래하고 춤추는 것에 대해 선입견이 짙게 깔려 있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2~3년 동안은 집안의 반대가 심해, 오빠들에게 머리카락을 잘리기도 하고, 큰언니는 빨리 시집이나 가서 현모양처나 되라며, 맞선을 열두 번도 넘게 주선했다고 한다. 그래도 소리가 하고 싶어 이불을 뒤집어쓰고 노래 부르고, 처마 밑 빗물받이로 놔둔 항아리에 머리를 처박고 노래를 부르며, 울기도 많이 울었단다. 그러나 소리는 그녀의 운명이었는지, 집안과 잘 아는 스님이 이 아이는 결국 자기의 길을 갈 테니, 그냥 자기 좋을 대로 살게끔 내버려 두라고 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 스님 덕분에 지금의 김영임이 있게 되었다고 한다.

“국민명창” 이 시대 진정한 국보급 소리꾼으로 찬사

 

어렵게 집안의 허락을 받은 그녀는 19살의 나이로, 당대의 경기민요의 대가 벽파 고(故)이창배 선생이 운영하는 ‘소리 양성소’에 들어가 소리의 기본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집에서 허락은 했지만 일절 지원해 주지는 않으셨어요. 혼자 고생해서 유학을 가든지 시집을 가든지 알아서 하라고 하셨죠. 그래서 단돈 몇 백 원으로 하루를 살며 소리를 배웠지요. 하지만 당시에는 교육 체계가 없어서 선생님의 입 모양만 보고 소리를 배웠어요. 주변의 인식도 곱지만은 않았고, ‘젊은 처자가 궁상맞게 한복을 입고 장구를 치느냐’는 말까지 들었지요. 그래도 참 열심히 했어요. 무용할 때, 소리를 따 라 부르며 흥얼거리던 습관이 있어서 처음 소리를 배우는데도 ‘어디서 배우다 왔냐?’는 말을 줄곧 듣기도 했지요!”

늦게 시작한 만큼, 그녀는 남들보다 서너 배는 더 공부하고 연습했다고 한다. 오전 9시부터 시조로 시작해 10시부터는 경기12잡가(雜歌)를, 11시부터는 경기민요와 서도민요를 배웠고, 12시에 수업이 마치면, 그녀는 곧바로 집에 가지 않고 남아서 그날 배운 것을 복습했다.

경기민요는 조선 후기, 서울과 경기도에서 발달해 온 민요와 잡가로, 화려하면서도 경쾌하고 군더더기 없이 단순하면서도 서정적인 것이 특징이다. 고음으로 치고 올라가다가 다시 내려오면서 살짝 소리를 꺾어 줄 때, 듣는 이의 애간장을 녹이는 묘한 매력이 있다. 판소리와는 또 다른 매력으로, 고전무용을 하면서 접한 소리에 푹 빠져 운명처럼 소리꾼이 된 김영임 명창은 이후 ‘회심곡’으로 단숨에 스타 반열에 올랐다. 1973년에 데뷔를 했으니, 소리 입문 불과 1년 만의 성과였다.

민속경연대회 대상, 명창대회 대상, KBS 전국민속노래자랑 대상 등을 받으며 이름을 알렸고, 그러다가 어느 날 MBC ‘내 강산 우리 노래’ 라는 국악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엉겁결에 선배 출연자 한 분이 펑크를 내는 바람에, 그녀가 대타로 TV에 나가서 소리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인연으로 방송에 계속 출연을 하게 되면서, 덕분에(?) 주변의 시샘어린 미움도 많이 받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듬해에 발매한 그녀의 야심작 ‘회심곡’이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며, 마침내 대박이 나기에 이른다.

“TV에 출연하는 저를 보시고, 당시 최고의 작곡가 고(故)박춘석 선생님께서 저를 한 번 보자고 하시더니, 만난 자리에서 대뜸 ‘회심곡을 부를 줄 아느냐’고 묻더군요, 그러나 사실은 제대로 배우지 못해, 아는 몇 대목만 불렀는데, 굉장히 좋아하시더라고요. 그 자리에서 1년 6개월 전
속 계약을 맺었지요. 그러고는 두 달 동안 이창배 선생님께 소리를 제대로 배운 후, 1974년에 ‘회심가’ 완창 앨범을 냈지요. ‘대박’이라는 말로 다 표현이 안 될 정도로 반응이 좋았어요!” 바로 이때부터 ‘김영임은 곧 ’회심곡‘ 이라는 공식이 만들어졌고, 당시 국악인으로서는 파격적인 행보로 주목을 끌었다고 한다.

김영임이 부르는 ‘회심곡’은 출생에서 저승길까지, 인생의 고비를 애절한 소리로 표현하고 있다. 노래는 모두 7개 부분으로 이어진다. ‘인생의 길’ ‘부모님 은혜’ ‘몇 년이나 산다고’ ‘죽음의 길’ ‘저승사자’ ‘풍도지옥’ ‘극락왕생’ 등 태어나 세상을 떠날 때까지, 욕심이 없는 마음으로 살자는 교훈이 담겨있다.

19세 데뷔, ‘회심곡’ 소리입문 1년 만에 스타반열에 올라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귀한 인재가 되고, 타인에게 무조건 베풀고 살라는 내용이니, 사실은 어느 누가 싫어하겠는가! 장단은 불규칙하지만 메나리조의 구슬픈 가락이 듣는 이를 사로잡는다. 반주가 없이 한 구절이 끝날 때마다 그녀가 직접 꽹과리를 치며 곡을 이끄는 점이 다른소리와 다른 회심곡만의 특징이다.

김영임은 노래를 통해 중년이 돼 자신의 삶을 잊은 채, 자녀들과 남편을 위해 열심히 사는 아내의 삶, 그리고 어머니의 삶을 표현하며, 부모님을 생각하는 시간으로 관객들의 눈시울을 붉게 만든다. 김영임의 소리 효(孝)공연은 국내 최초 국악 뮤지컬로 ‘효(孝)’를 주제로 우리나라의 전통 국악을 종합 공연예술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그녀는 대중매체인 TV를 통해 화려하게 비상하며 국악계의 스타로 떠올랐고, 나이 지긋한 국악인들이 출연하던 국악프로그램에 21살의 여성국악인이 출연해, 예쁜 얼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투박한 소리와 투명한 소리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니 시청자들의 눈과 귀는 자연 그에게 쏠릴 수밖에 없었다.

김영임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 전수생으로 입문하여, KBS TV ‘연말 명인명창대회’에서 ‘방아타령’과 ‘양산도’를 불러 인기를 모았다. TV에 고정 출연하며, 74년 음반 ‘회심곡’을 냈을 당시, 21살에 녹음한 ‘회심곡’ 판매는 국악계 최초로 밀리언셀러(1백만 장)가 되어, 수많은 팬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며, ‘회심곡’ 스페셜리스트가 되기에 이른다. 그녀의 소리에 대한 열정은 상상을 초월한다. 지난 90년대에는 국가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예능보유자 故묵계월 선생의 문하로 입문하여, 이수자를 거쳐 이듬해 전수교육조교로 지정된다.

그 후, 매년 서울세종문화회관 대극장(1일2회공연 6,000석)에서 3일에서 길게는 7주일동안 공연을 해오고 있으며, 전국의 무대와 해외 뉴욕의 카네기홀 등에서 공연을 해왔다. 또한 2005년에는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경기12잡가 완창발표를 하였으며, 음반과 악보가 담겨있는 12잡가 책도 출간하였다. 그렇게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소리공연을 통해 우리의 소리를 널리 알리고 있다. 국악에 드라마와 퍼포먼스를 가미한 국악뮤지컬로, 국악공연으로는 유일하게 지난 30여 년간 130여개 도시에서 300회가 넘는 공연으로 객석점유율92%, 누적관객 110만을 넘어서며, 명실상부한 명품 공연브랜드로 그녀의 유명세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회심곡은 자식이 부모님에 대한 孝를 이야기하는 노래잖아요. ‘제가 회심곡으로 큰 은혜를 입었으니 효는 김영임이 해야겠다’ 생각했어요. 사실은 남편(코미디언 이상해)의 아이디어였고요. 앞으로는 살면서 점점 자식이 효를 모르는 시대가 올 것이다. 이럴 때, 회심곡을 부른 제가 공연을 통해 孝라는 메시지를 던지면 좋을 것 같고요. 그런데 정말 그런 세상이 왔잖아요. 부모·자식 간에도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세상에서, 소리로 효의 의미를 전하고 민중의 희로애락을 어루만져 주는 것에 대해 책임과 사명감을 가지고 있어요.”

‘김영임의 소리 孝’는 그녀가 직접 프로듀싱부터 믹싱, 마스터링, 음반 재킷 디자인까지 앨범제작의 모든 부분에 참여해 만들어진 앨범으로, 그녀는 국악인으로서 ‘최초’라는 타이틀을 가장 많이 지니고 있다. 국악인 최초 밀리언셀러 앨범, 최초 뉴욕 카네기홀 공연, 최초 국악뮤지컬 공연, 최초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공연, 최초 런던 로열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공연 등 관객들에게 숱한 화제와 감동을 주며, 항상 도전하는 그녀의 소리에 대한 열정은 천상의 타고난 기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객석점유율 92%, 누적관객 110만, 음반발매 100만

30여년,국내외130여개도시300회공연전무후무한기록

소리꾼 김영임의 인기비결에는 세 가지 정도가 있다. 첫째 그녀가 부르는 소리는 결코 은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가는 매끄러운 소리는 아니다. 정보화 사회의 현대인들이 그리워하는 원시적이고 토속적인 소리가 이 땅의 역사를 말해주듯, 한이 서려있는 목소리로 전국의 민요를 몽땅 섭렵해야 한다.

둘째로 그녀의 변신은 공연장의 조건에 재빨리 적응한다. 노래하는 장소가 공연장이든, 방송국이든, 스튜디오든, 상황판단이 빠르다. 거의 동물적인 본능으로 의상, 소리, 무대 매너 등을 신속히 맞춘다.셋째로 그녀의 외모는 미모를 겸비한 인간적인 체취 등 미디어 시대에 소리꾼으로서의 요소를 두루 갖추었다는 평가다.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의상과 소도구 등에도 각별히 신경을 쓴다. 가냘픈 몸매의 그녀가 출현해 걸쭉하고도 청아한 소리를 구사할 때, 관객들에게 신선하고 아름다운 충격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소리꾼 김영임과 그녀의 남편 코미디언 이상해씨와의 결혼 폴 스토리 또한 아름다운 감동의 드라마로 손색이 없다. 집안의 막내 김영임은 성인이 되면서 ‘트러블메이커’가 됐다. 20대 초반에 코미디언 한 무씨의 소개로 이상해씨를 만났는데, 자신은 그런 코미디언이 있는 줄도 몰랐다고 한다. 코미디 프로그램 자체를 싫어하던 그녀로서는 훗날의 남편 이상해씨를 모르는 게 당연한 일. 이상해씨는 그녀를 처음 보자마자 집요하게 구애했다. 김영임의 집에선 ‘이상해의 나이가 많다’ ‘돈이 없다’ ‘할머니와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6남매의 장남이다’ ‘코미디언은 결코 NO’ 등을 이유로 ‘고생길이 훤한’ 결혼을 한사코 반대했다. 그러나 탄압이 심할수록 반발은 더하는 법. 그녀는 28세에 이상해씨와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고있으며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전형적인 효자, 효부로 시어머니를 모시며, 남편과 함께 서울 삼성동에서 오붓
하게 살고 있다.

소리꾼 김영임은 ‘아리랑’의 연구와 보급, 교육에 힘쓰고 있는 사단법인 아리랑보존회의 이사장으로도 사회적 직함을 지니고 있다. 아리랑의 체계적인 보존을 통해 문화코드로서의 가치를 높이는 한편, 새롭고 창조적인 문화콘텐츠로 지속 발전시키는 것이 목표다. 국내 9곳에 지부가 있고, 미국 뉴욕과 LA, 캐나다 등지에 해외지부가 있다.

소리꾼 김영임은 지난 수십 년간 과거의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는 전통 공연예술을 오늘의 대중문화로 재탄생하여 또 하나의 전통을 만들어왔다. 사명감으로 시작된 김영임의 활동은 특히 공연에서 두드러진다. 그는 국악인으로 유일하게 한해도 거르지 않고 20여 년간 전국투어를 이어오며 ‘김영임의 소리 孝’ 라는 명품 국악뮤지컬이라는 장르를 개척해냈다. 무엇보다 그녀의 발자취는 단순히 국악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보존되어야 할 가치가 있는 전통의 소리에 흥미 있는 외적 요소를 결합하여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 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묵계월 유파의 계승자이자 전수조교로서 50여년간 우리의 소리를 지켜오며, 경기소리와 12잡가의 원형을 흩트리지 않게 고수하고 연마하며 후학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이 시대 진정한 국보급 소리보물로 뭇 관객들에게 잔잔한 감동과 눈물을 선사하는 그녀의 원동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본래 무일(無逸)이 무일치(無逸治)라고 했던가! 진흙에서도 유유히 피어나는 한 송이 연꽃처럼 강인한 생명력으로 인고의 세월을 참고 견디어 냈을 소리꾼 김영임. 입추의 계절에서 만난 늦더위가 오늘만큼은 왠지 더위로 느껴지지 않았다. 공연장에서 본지의 발행인을 단상에 모시고 환대 해 준 마음 씀씀이가 사뭇 고맙다.

국악인 김영임은?

출생 1953년, 서울
데뷔 1979년 민요 '회심곡'

<현재>
-국가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전수교육조교
-담월 묵계월 소리보존회 회장
-(사)아리랑보존회 이사장
-(사)한국국악협회 부이사장
-김영임 소리아트컴퍼니 대표
-중앙대학교 국악과 객원교수 역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교수 역임
-이화여자대학교 국악과 출강 역임
-동국대학교 불교문화대학원 외래교수 역임
-문화체육관광부 명예교사 역임

주요 수상내역

-1995. 12. 27 제14회 KBS 국악대상 대상 수상
-1997. 09. 03 제24회 한국방송대상 국악인상 수상
-2000. 10. 31 국민포장 수상(대통령상)
-2000. 12. 21 선행상 수상 국무총리 훈장 수훈
-2003. 10. 20 화관 문화훈장 수상(대통령상)
-2004. 09. 03 제31회 한국방송대상 국악인상 수상
-2009. 12. 21 대한민국 국회대상 국악부문 수상
-2013. 12. 20 제13회 자랑스런한국인대상 수상(한국언론인연합회선정)
-2015. 02. 13 제32회 한국국악대상 경기민요부문
-2015. 11. 26 제23회 대한민국문화연예대상 국악대상
-2016. 12. 18 (사)한국음악실연자 연합회 공로상 수상
-2018. 01. 18 제4회 대한민국예술문화 스타대상 국악인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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