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시언] 나이가 든다는 것
  • 박영숙 총재
  • 승인 2019.11.04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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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가을을 추념(追念)합니다

 

가을이 깊어 가고 있다. 거리거리 가로수마다 형형색색 단풍이 들어간다. 바람에 흩날리는 은행나무 이파리. 퇴근하는 길에는 떨어진 은행잎으로 수북하다. 서늘한 바람에 간댕거리던 은행잎이 머리에 떨어진다. 오래잖아 은행잎이 모두 지고 나면 앙상한 나뭇가지만 을씨년스럽게 서 있으리.

시몬, 나무 잎새 져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낙엽 빛깔은 정답고 모양은 쓸쓸하다.
낙엽은 버림받고 땅 위에 흩어져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구르몽의 시 ‘낙엽’이 떠오른다. 여고 시절 뜻도 모르고 외우던 시. 깔깔거리며 낙엽 위를 걷고, 은행잎 주워 꽂던 책갈피의 추억, 벤치에 앉아 재잘거리던 친구들. 그렇게 흘려보낸 세월이 얼마였던가? 새싹 파릇파릇 돋아나던 청춘이 가고, 장맛비에 흥건히 젖어도 뜨겁기만 하던 열정도 가고, 그러다 문뜩 고개 들어보니 가을 언저리다.

꽃처럼 피어오른 단풍, 그 장중한 의연함이여

가을은 여전히 아름답다. 단풍이 꽃처럼 피어올랐다. 봄꽃과 달리 장중하다. 봄꽃과 달리 의연하다. 봄꽃과 달리 노련하다. 가을꽃이 이토록 농염했던가? 가을꽃처럼 우리 가을도 이렇게 아름답게 물들 수 있을까? 우아하게 겨울을 맞이할 수 있을까?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나이가 든다는 것은 ‘산 날을 빗자루 삼아 살 날을 비질하는 일’이다. 낙엽을 쓸 듯 지난날을 쓸다 보면 하나 둘 셋 이파리마다 그 자취가 선연하게 마련이다. 어떤 자취는 아픔이요, 어떤 흔적은 열락(悅樂)이다. 아픔이건 열락이건 곱게 주워 따사로이 포옹할 일이다.

70년 역사 시어머니 자개장롱에 얽힌 사연

며칠 전 필자는 시어머니가 열일곱 살에 시집오면서 장만했다는 자개장롱을 내다버렸다. 90세를 바라보는 어머니 생애가 고스란히 묻어 있는 장롱. 어머니는 장롱 버리는 걸 두고 열 번 넘게 의사를 번복하셨다. 버리라고 했다가는 막상 내놓으려고 하면 곁에 서서 장롱을 쓰다듬는다. 차마 버릴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러다가 때마침 이사를 하게 되었고, 어머니는 굳게 결심하셨다. 자개장롱을 바깥에 내놓고 돌아서는데 가슴이 짠하고 눈이 핑 돌았다. 잠시 고민하다가 이건 아니다 싶었다. 달려 나갔더니 장롱은 그 자리에 없었다. 불과 30분 사이에 누군가 집어간 상황이었다.

결혼하고 자존감 때문에 한 번도 남편과 싸우지 않고 살았던 시간, 시어머니 앞에서 실수하지 않고 살았던 시간이 스크린처럼 스쳐갔다. 이토록 자존감 세우고 살았건만, 그리고 고집 부리듯 장롱을 내다버렸건만. 가슴이 무너지듯 아팠다. 어머니의 생애를 한꺼번에 내다버린 듯 고통이 밀려왔다. 처음으로 어머니께 미안하다고 말씀드렸다. 진작 했더라면 참으로 좋았을 속 깊은 소통은 이렇게 2019년 가을에야 비로소 비롯되고 있었다.

가을은 알곡과 쭉정이라 가르는 계절

봄과 여름이 개척이요 도전이라면, 가을은 가르는 계절이다. 알곡과 쭉정이로 갈라 버릴 건 버리고 취할 건 취해야 하는 계절이다. 개척하고 도전하는 동안, 미처 살피지 못한 것들을 다독이는 계절이다. 마치 어머니 장롱을 버리면서 수십 년 서러움을 내려놓듯이 하나둘씩 보듬어야 하는 계절인 것이다.

단풍이 곱게 물든 가을처럼 늦가을을 사는 나도 아름다워야 할 것인데. 알곡과 쭉정이 고르듯 잘 갈라야 할 텐데. 누구든 맞이해야만 하는 가을 나이. 좀 더 나이가 든 사람은 이미 가을을 거쳐 갔고, 좀 더 젊은 사람은 언젠가 가을이 다가오게 마련이다. 아름다운 가을을 맞이한 벨기에 여배우 오드리 햅번 이야기를 해야겠다.

‘티파니에서의 아침을’이라는 영화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던 여배우. 세기의 미인도 세월 흐름 앞에서 도리가 없었다. 주름살은 늘고, 머리칼은 버성기고, 전신에 검버섯이 피었다. 그녀가 하루는 사진관에 들렀다고 한다. 사진사에게 조용히 다가가 부탁했단다.

“절대 얼굴 주름살 지우지 마세요”

사진사가 다소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자 그녀가 웃으며 말했단다.

“이걸 얻는 데 평생이 걸렸거든요.”

가을이 오면 진정한 아름다움이 시작되어야

누구나 맞이하는 가울. 이처럼 아름다울 수 있을까? 젊은 시절 아름다움이 외모였다면, 초로의 아름다움은 세상을 사랑했던 따뜻한 마음씨였다. 그녀는 영화계를 은퇴하고 64세로 세상을 뜨기까지 전 세계를 돌며 기아와 병마에 시달리는 아이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전개했다. 세계 2차 대전을 경험하면서 굶주림과 두려움을 겪었던 오드리 햅번. 명예와 부를 동시에 거머쥔 그녀였지만, 가을 녘에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빈국을 돌며 국제구호기금(유니세프의 전신)의 홍보대사 역할을 해냈다.

젊음만 아름다운 것은 결코 아니다. 가을이 오면 진정한 아름다움이 시작된다. 오늘의 나는 과거가 빚는 법이다. 지난 봄 여름을 거치면서 빚어진 내가 오늘의 나다. 가을 어느 날 잘 빚어진 자신을 돌아보면서 그 아름다움에 스스로 매료되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가을바람에 은행잎 하나가 흩날려 내 가슴을 스친다. 예쁜 꽃보다 곱게 물든 단풍이 더 아름다운 가을이 익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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