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리스트(White List) 배제, 일본의 속내는?
  • 양철승 기자
  • 승인 2019.09.11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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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불매운동은 21세기형 조선물산장려운동

 “한국이 감내해야할 고통이 더 적을 겁니다. 일본이 더 크게 고통 받을 거예요. 아베 총리는 일본을 망치고 있습니다.” 세계적 투자자 짐 로저스 홀딩스 회장이 모 방송에서 언급한 내용이다.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로 촉발된 일본불매운동이 두 달째로 접어들었다. 일본불매운동은 역사 왜곡과 독도 망언이 있을 때마다 종종 벌어졌지만 이번에는 양상이 전혀 다르다. SNS로 중무장한 20~30대가 중심이 된 소비자들이 자발적으로 불매운동을 주도하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시민들의 참여 열기가 식을 줄 모르고 있다. 

에디터_양철승 cabbang1972@gmail.com

 

현재 일본 불매운동의 대상은 여행과 의류, 맥주, 화장품이 주요 품목이지만, 점차 자동차, 캐릭터, 금융 등 전 산업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특히 촛불시위 등을 통해 체득한 성숙한 시민의식이 표출되면서 과도한 국수주의와 감정적 대응에 빠지지 않도록 자체 정화작용도 활발하다. 일본 불매운동이 평범한 소비자 운동을 넘어 사회운동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21세기형 조선물산장려운동

일본 불매운동의 효시는 조선물산장려운동이었다. 일제 강점기인 1920년 평양기독교계 지도자들이 조선물산장려회를 발족하면서 시작돼 1930년대 말까지 전국적으로 전개된 경제자립운동이다. 국산품 애용을 통한 자주경제 구현을 표방했는데, 밀려드는 일본상품으로 인해 국내 산업이 무너지는 상황을 막기 위한 자구책이었다. 하지만 조선물산장려운동을 독립운동의 일종으로 본 일제의 탄압과 방해로 실패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흘러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올해 한반도가 ‘노노재팬(no!no! japan)’의 열기로 다시 달아올랐다. 일본 정부는 부인하고 있지만 우리나라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경제 보복의 일환으로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를 단행한 것이 시발점이 됐다. 당초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할 것이라는 일부 예상과 달리 이번 21세기형 조선물산장려운동은 시민의 자발 참여 속에 들불처럼 번져나가고 있는 상태다. 시작은 일본 제품을 ‘사지 말자’였지만 이제는 ‘사지도, 가지도, 팔지도 말자’로 확대됐으며 10대부터 중장년층까지 연령대를 불문하고 전국에서 참여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국내에 진출한 일본 브랜드(제품) 리스트와 대체제품 정보를 알려주는 ‘노노재팬’ 사이트에 등재된 일본 브랜드 수만 해도 사이트 개설 당시 30~40개에서 8월 21일 현재 234개로 늘었다. 이로 인한 사회적경제적 영향이 가시화되면서 한국과 일본 정부 모두가 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번 일본 제품 보이콧에서 발견되는 또 하나의 특징은 우리 정부가 자신감을 갖고 일본 수출규제에 대응하는 동력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와 화이트리스트(수출심사 우대국) 배제 결정은 우리나라에게 위기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정부는 일본이 바라는 대로 대법원의 판결을 재고할 가능성을 내비친다거나 일본과의 협상에 올인하지않고 대신 단기적 피해를 감수하고라도 제 목소리를 내는 길을 택했다. 일본이 끝내 협상 테이블에 나서지 않는다면 소재 국산화, 수입처 다변화를 강력히 추진해 일본에 대한 국내 산업의 의존도를 줄이는 기회로 삼겠다는 것이다. 이처럼 정부가 보여주고 있는 일관된 행보는 불매운동으로 뭉친 국민적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치킨게임을 시작한 일본의 속내

물론 양국의 이 같은 치킨게임은 누구에게도 이익이 되지 않는다. 조속히타협점을 찾아 갈등을 봉합하는 것이 양국과 글로벌 경제를 위한 최상의 결정이라 할 수 있다. 한국경제연구원이 시장조사기관 모노리서치에 의뢰해 매출액 기준 1,0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응답기업 153개사의 51.6%가 경영상의 악영향을 우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특히 일반 기계, 석유제품 업종에서 각각 13.6%, 7.0%의 매출감소를 예견했다. 이는 반도체 업종의 매출 감소전망치 6.6%를 웃도는 것이다. 전체 응답기업의 평균 매출액 감소율 전망치는 2.8%였다.

그렇다면 이번 사태가 장기화할 경우 한국과 일본 중 누가 더 심대한 타격을 받게 될까. 한국이라고 답하는 전문가는 일본인을 포함해 극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은 일본이 한국을 향해 겨눈 칼이 결국 스스로를 찌를 수 있다고 경고한다. 구매자인 우리나라는 과정이 험난하더라도 대체 구매처를 발굴할 수 있지만 판매자인 일본은 국내총생산(GDP) 기준 세계 12위의 경제대국인 한국을 대체할 큰손 확보가 결코 쉽지 않은 탓이다. 특히 반도체는 국내 기업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세계 최대 메이커라 대체 고객 확보는 사실상불가능하다. 모리타화학공업, 도쿄오카공업 등 양사와 거래 중인 일본 반도체 소재 업체들도 이를 직시하고 중국이나 한국에서 제품을 생산공급하는 방안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일본이 지금처럼 불매운동 폄훼와 수출규제에 억지주장을 지속하는 이유를 두고 여러 가지 분석이 나오고 있다. 지난 7월 21일 치러진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일본 내 우익세력의 결집을 유도하려는 정치적 속내가 숨어있다는 의견이 대표적이다. 이런 가운데 최근 세계적 투자자인 짐 로저스 로저스홀딩스 회장으로부터 주목할 만한 분석 하나가 제기됐다. 그는 광복절에 방송된 국내 한 시사프로그램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현재 한일 갈등의 원인은 일본이 추락하고 있는 반면 한국은 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한국을 저지하려 할 겁니다. 아베 총리는 한국의 성장을 막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점점 더 나쁜 방법으로 대처할 겁니다.”

그래서였을까. 지난달 21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한중일 외교장관회의에 참석한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이 별도의 양자회담을 가졌지만 서로의 입장차이만 확인했을 뿐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사회운동 수준으로 진화하고 있는 일본불매운동이 향후 일본 정부의 노선 변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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