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프로복싱 세계 챔피언 '박종팔을 만든 사나이' 요즘 뭐하나 봤더니
  • 김지현.유안나 기자
  • 승인 2019.08.06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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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발 비리와 전쟁 중 ....."나를 믿고 시작한 싸움, 끝까지 가야죠"

세계적인 스포츠 선수가 탄생하기까지는 많은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지원이 있기 마련이다. 세계 슈퍼미들급 챔피언에 오르며 80년대 최고의 스포츠 스타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던 박종팔 선수도 마찬가지. 1977년 혜성처럼 등장해 강력한 펀치를 앞세워 46승5패1무의 전적 중 KO승만 39번 거두며 승승장구 했지만, 당시 많은 복서들이 그러했듯이 그도 전형적인 ‘헝그리 복서’였다. 그때 그런 그를 물심양면으로 아낌없이 지원했던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은호실업 김종열 회장이다. 김종열 회장이 어떤 인연으로 박종팔 선수를 오랜 기간 전폭적으로 지원하게 됐는지, 그리고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여성시대는 지난 24일 김회장을 만나 그간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전 세계 챔피언 박종팔 선수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된 것인가요?

한 50년 된 인연이네요. 박종팔 선수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어머니를 여의고 새어머니를 맞았는데, 그 분이 우리 집안 아주머니셨어요. 그리고 박 선수 형이 나랑 친구였고. 박종팔 선수 이복형도 나랑 친구였고. 어렸을 때니까 급속도로 친해졌죠. 그 사람 누나가 중매해줘서 우리 집 사람도 만났고. 또 워낙 많이 친했어요. 내가 선보러 갈 때 그 친구가 운동가방 메고 따라왔고, 그 친구 선볼 때도 내가 진도까지 따라가는 그런 사이였죠.


박 선수보다 두 살 많으신데. 두 분 다 젊었을 때였고 대 표님도 소위 ‘소년가장’이셨을 때인데 어떻게 지원하게 되셨나요? 


저는 일찍 사업을 시작했어요. 제가 사업해서 성공한 스토리도 책으로 쓰면 몇 권은 될 거예요. 어려서 부모님 여의고 여동생 둘 데리고 고생하면서 ‘공부 필요없다. 무조건 사업을 해서 빨리 돈을 벌겠다.’고 다짐을 했죠. 18살 때부터 공장 세운다고 말하고 다녔으니까. 그때는 여동생들이 비웃고 놀리고 그랬는데 진짜로 20대 초반에 가구 사업을 시작한 것이죠.. 그때만 해도 공장에 설비가 잘 되어있고 그러지 않았어요. 거의 수작업으로 가구를 만들던 때라 공구 몇 개랑 가구 만들터만 있으면 시작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죠. 공장들이 기계화 되기 시작한 것이 80년대 초중반 부터였고 90년대 초반부터 컴퓨터가 퍼지면서 본격적으로 자동화된 것이죠. 그때까지 만해도 우리나라 차는 포니뿐일 때였으니까. 그렇게 시작한 작은 사업체였지만 그래도 사업을 했으니 친구들보다는 벌이가 나았고 총각 때였으니까 여러 가지로 지원을 많이 하게 된 것이죠. 박 선수 데뷔했을 때 기거할 집도 없었어요. 박 선수가 동양챔피언 되고 나서도 트로피 인정서 그런 것들이 우리 집에 다 있었죠.


‘ 스포츠 마케팅’ 같은  목적은 아니고, 그냥 순수하게 지원 하신거네요?


박찬호 선수에 관련해 ‘아버지가 전파상을 하셨다. 어렸을 때 아버지 가게에서 박종팔 선수 시합보면서 즐겼다’ 라는 기사가 났던데 그 기사를 읽으며 내가 눈물이 나더라. 그 친구 기사를 보면 내 기사를 보는 것 같다. 스포츠계 최고봉 아니냐. 그런 것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다. 그 친구가 챔피언이 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내가 대리 만족한 것이다. 나도 그 친구랑 있으면 좋았고. 그 친구랑 있으면 아무도 못 건드렸다. 덩치도 나보다 컸고. 같이 다니면 아무도 동생이라고 보지 않았다. 친구같은 동생이었다.
정말 재능도 많았고. 운동신경은 타고 나는 것 같다. 운동 열심히 안하는 것 같았는데 잘하더라. 그 집안 형제들이 다 운동을 잘한다. 막내도 테니스 선수다.


순수한 열정들이 만났기에 좋은 결과가 나왔던 것이 아닐 까 싶습니다.

요즘은 재개발 비리에 맞서 싸우고 계신다고 들었는데요.


조합 비리가 많다고 듣긴 했지만 내가 당한 적은 없었죠. 그런데 내 빌딩이 있는 천호동 땅이 재개발에 들어갔는데 조합 비리가 도를 넘더라. 그래서 정말 고민했는데, 이건 정말 아니다 싶어서 나서게 된 것예요.


재개발 비리에 치를 떠는 사람은 많지만 앞장서 나서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쉽지 않은 싸움이고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드는 일이니까요.
저는 이 일에 나섬으로서 세금만 50~60억 정도 더 내야했어요. 그 정도로 ‘이 일은 반드시 바로잡겠다’는 굳은 각오로 나선거죠. 저도 물론 처음에는 아파트를 분양받을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종전감정평가를 했는데 결과가 말이 안되는 거예요.


조합원 이사 대의원 등 조합 임원들의 땅만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높은 감정가를 받았더라고요. 대로변에 있는 제 땅보다 이면 도로에 있는데 조합장 땅의 가격이 더 높은 정도라면 말 다했죠. 조합장 땅 주위로 섬처럼 감정평가가 높게 나온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문제는 종전 감정평가를 다시 하려면 현금청산자 절반 이상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거죠. 한번 현금청산을 받기로 결정을 하면 다시 조합원이 될 수가 없어요. 아파트나 상가같은 대물로 받으면 세금을 내지 않지만 현금 청산을 받으면 세금만 50~60억을 내야 하고요.

그런데 참을 수가 없더라 고요. 현금청산을 받기로 하고 현금청산자 대표가 되어 동의를 받는데, 조합측에서 엄청나게 방해하더라고요. 흑색선전 회유 등은 약과죠. 허위 동의서를 받아 사업 진행을 방해한다고 모 신문사 기자를 매수해 기사를 내질 않나, 사문서 위조로 고발을 하질 않나. 그런데 거짓이 진실을 이길 수 있나요? 무려 7장의 사문서를 위조했다고 고발을 했는데, 경찰 조사 한번 안 받고 사건이 종료됐죠. 결백하지 않았다면 그럴수가 있었을까요.


조합은 조직이 있고 건설회사와도 연결되어있죠.

그런 조합과 개인이 싸워 이기기가 쉽지 않은데 대단하시네요.


50~60억 손해 무릅 쓰고 ‘이 일은 반드시 바로잡겠다’는 굳은 각오로 나선거죠

온갖 방해를 이겨내고 마침내 다시 감정평가법인을 선정했을 때 성취감이 엄청났죠. 정말 기뻐서 날아갈 것 같더라고요. 지금 새로 선정된 감정평가법인이 ‘가짜기사’ 관련해 조합과 소송을 진행하고 있어요. 가짜기사에 제가 허위로 동의서를 받았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죠. 제가 도저히 두고볼 수가 없어서 디지털 포렌식까지 해서 증거자료를 모두 냈어요.

이제는 조합장이 아무리 거짓말을 해도 책임을 피하기 힘들 거예요. 선고기일만 남아있는데, 나는 정의대로 했고 결론도 그렇게 날 것이라고 믿습니다. 오로지 ‘거짓은 진실을 덮을 수 없다.’라 는 신념 하나로 시작한 일이예요. 정말로 그거 하나였어요. 동의서 받으면서 하나하나 내가 다 크로스체크 했어요. 그 런데 그렇게 고약한 주장을 할 수가 있나 요.  저는 동의서 받는 과정을 내가 일일이 확인했기에 나를 믿고 이 싸움을 시작한 것예요. 그런 것은 변호사도 모르죠.


재개발 비리와 전쟁이 끝이 보이는 것 같네요.

스포츠 선수 스폰서도 성공하시고 사업도 성공하시고 실패해 본 적은 없으신가요?


물론 있죠. 그것도 엄청나게 크게 실패했어요. 84년에 집 몇 채 가격의 부도를 맞았고. 어디 기댈 데도 없는데. 도저히 복구할 길이 보이지 않더라고요. 그때는 정말 ‘지방으로 도망가야 하나’ 고민하면서 자포자기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평소 알고 지내던 가구업계 회장님이 “소문 듣고 왔다.”며 “내가 밀어줄게 재기해봐.”라고 하시며 선뜻 천만원을 지원해주셨다. 저보다 15살 많으셨는데, 저를 예쁘게 보셨는지 그렇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그 당시 천만원은 엄청나게 큰 돈이었다. 덕분에 1년 만에 부채 다 갚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죠. 그렇게 재기해서 40대 초반에 처음으로 빌딩을 살 수 있었고. 그때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그 빌딩이 바로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천호동에 위치한 빌딩이네요.


평소 회장님의 됨됨이를 잘 보셨던게 아닐까 싶네요. 회장님만의 어떤 성공 비결이 있을까요?

제가 1992년부터 2000년까지 한 10여년간 전국 가구판매 순위 1등을 달렸어요. 비결은 광고였다. 그때는 그렇게 가구 광고를 많이 하던 때가 아니었는데 저는 신문 광고를 엄청나게 했어요. 인생역전을 거기서 했죠. 웬만한 가구점 매출의 20~30배는 올렸을 거예요. 신문광고도 조중동만 하지 않았어요. 벼룩시장 교차로가 처음 생겼을 때 광고효과가 굉장히 컸어요.


무가지가 생기자마자 그쪽 광고에 집중했는데 그 때 반응이 폭발적 이었죠. 하루에 전화만 수백통씩 왔으니까. 그때 물건을 제조할 때 생산 원가에 광고비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죠. 광고의 중요성을 그쪽 업계에서는 일찍 알게 된 거죠.


항상 노력하고 열정 넘치는 모습이 정말 보기 좋습니다.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건강관리를 잘 하고 있긴 하지만 이제 나이가 있으니 있는 재산 잘 관리해서 유지하는 것이 목표예요. 사업을 새로 벌이고 하진 않을 것 같아요. 그리고 부동산업을 하고 있지만 이번에 너무 질려서 재개발 개건축 쪽은 앞으로 안쳐다볼 것 같아요. 하하. 


박종팔 (朴鍾八)

前 세계복싱협회(WBA) 슈퍼미들급 챔피언 前 국제복싱연맹(IBF) 슈퍼미들급 챔피언 前 동양태평양복싱연맹(OPBF) 미들급 챔피언
박종팔 선수는 1958년 8월 11일 전라남도 무안군 태생으로, 우리나라 대표적인 권투선수로 알려져 있다. 1977년에 프로 복싱에 데뷔한 그는 이듬해 최창백으로부터 KO 승을 따내며 한국 미들급 챔피언에 올랐다. 박종팔 선수의 최대 강점은 강한 펀치력. 그는 그 이후에도 강한 펀치를 앞세워 18경기 연속 KO승을 따내는 진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1979년 동양태평양복 싱연맹(OPBF) 미들급 타이틀을  거머쥐었으나 박종팔은 1981년 풀 헨시오 오벨메이야스의 무릎을 꿇으며 세계와의 격차를 실감하게 되었다.
당시 오벨메이야스는 26전 26승 26KO라는 대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박종팔 선수도 이 선수의 벽을 넘지 못하고  KO패를 당하 게 된 것이었다. 그 후 박종팔 선수는 새롭게 세워진 국제복싱연맹(IBF)에 진출 했다. 물론 당시 IBF는 먼저 설립된 WBA나 WBC 등에 비하면 명성과 흥행, 선수기량 모두 떨어지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아시아권 선수가 세계를 무대로 증량급 체급에서 활약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는데, 박종팔 선수는 슈퍼 미들급에서 미국의 머레이 서덜랜드를 꺾고 당당히 월드 챔프에 오른다. 그리고 8차례의 방어전을 성공하며 최고전성기를 누린다. IBF 타이틀을 자진해서 반납한 박종팔 선수는 WBA에서 슈퍼미들급 체급이 신설되자 WBA로 진출했다. 박종팔은 챔피언 결정전에서 헤수스 갈라도로부터 2라운드 KO승을 거두며 다시 한 번 세계 챔피언에 등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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