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호 전 (재)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이사장
  • 김지현 기자
  • 승인 2019.08.05 16: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는 장애인으로 산 적이 없어요. 남보다 조금 일찍 불편해졌을 뿐이죠”
"나이들면 지팡이 짚다가 휠체어 타게 되요. 우리 모두는 예비 장애인이죠"
"유니버설 디자인 통해 장애인 비장애인 모두 편안하고 행복하게 공존해야"

 

아침에 장님을 보면 재수없다고 침을 뱉고, 장애인이 식당에 가면 ‘안판다’던 때가 있었다. 두 살 때 소아마비로 걷지 못하게 되자 친아버지한테도 버림받을 정도로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극심했던 시절, 수 많은 역경을 이겨내고 미국 신시네티 대학 출신의 비올리스트가 되고 서울심포니오케스트리 수석 비올 리스트를 거쳐 구리시 교향악단의 음악감독과 아산사회복지재단 예술감독을 맡았고, (재)한국장애인문 화예술원(이하 ‘장문원’) 이사장으로 활약하다 퇴임한 신종호 전 장문원 이사장. 63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공부 중”이라며 “장애인 예술교류를 통해 남북통일에 기여하고 싶다”는 그는 장애인의 꿈과 희망일 뿐 아니라 우리 사회 모두의 귀감이다. 그는 어떻게 수많은 역경을 딛고 성공스토리를 쓸 수 있게 되었을까? 본지는 지난 22일 신 전 장문원 이사장을 만나 그가 살아온 이야기와 앞으로의 계획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바람직한 관계를 들어보았다.


                                                                                                                                                                             에디터_ 김지현 apollonian@hanmail.net

한국 사회가 장애인이 살기에 편한 곳은 아닌데, 일반인도 성공하기 힘든 예술계에서 일반인들과 경쟁해서 예술가로 성공하셨어요.


제 인생을 두 단어로 말하자면 오기와 자신감이에요. 오기가 세고 자신감이 컸죠. 그게 제가 버틸 수 있었고 이렇게 살 수 있었던 가장 큰 배경이 아닐까 해요. 장애인으로 차별을 받은 경험은 셀 수도 없이 많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택시타는 것도 정말 힘들었어요. 휠체어 타고 택시 잡으면 다 도망가요. 식당 들어가 면 구걸하러 온 줄 알고 무조건 “없어요.”라고 하죠. 고급 호텔에 가도 마찬가 지예요. 사우나 하고 싶지만 입장 자체가 안돼요. 그러면 오기가 나서 손에 돌멩이를 쥐고 택시를 기다려요. 택시가 도망가면 돌을 던졌죠. 그런데 돌에 맞아 깨져도 도망을 가더라고요. 그래서 한 번은 택시 번호를 외워서 대전역에서 하루종일 기다렸어요. 택시는 반드시 역에 한 번은 들르게 되어 있거든요. 하루종일 기다려서 택시기사 멱살을 잡고 “어떻게 그럴수 있냐”고 화를 냈죠. 그랬더니 그분이 “하루종일 마음에 걸렸는데, 당신이 이렇게 화를 내니 오히려 속이 편하다”라고 하더라고요.

호텔 사우나도 저는 완전 흙수저지만 장애인도 사우나를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마음으로 일부러 다녔죠.

타고난 기질도 있겠지만 그렇게 강하게 살게 되신 계기가 있으실 것 같아요.


성제재활학교에서 보낸 시간이 지금의 저를 있게 했죠. 저는 비원 옆 운니동에서 태어났어요. 처음에는 할머니 등에 업혀 교동초등학교를 다녔죠. 그런데 어릴 때는 소변을 참기 힘들잖아요. 당시에는 휠체어도 없었고. 혼자 화장실에 갈 수가 없으니 자리에 앉은 채로 싸는 거죠. 그 축축한 느낌이 아직도 뇌리에 있어요. 당시 여선생님이 담임이셨는데 수학문제를 내고 “누가 풀래?”했을 때 손을 들면 “이 문제는 종호가 풀어야 돼.”하시며 오줌이 축축한 절 업고 칠판에 가서 문제를 풀게 해주셨어요.

소풍도 가본 적이 없는데 그 선생님이 담임이셨을 때 딱 한번 갔어요. “종호가 소풍 안가면 우리 안 간다”고 하셔서 업혀서 창경원에 갔었죠. 그때 그 선생님이 정말 고마워요. 그러다가 할머니가 돌아가셨죠. 아버지는 ‘병신자식’이라며 저를 버리셨고 어머니는 생계를 꾸리셔야 하니까 절 키우실 수 없고. 그래서 대전에 있는 특수학교인 성세재활학교에 가게 됐어요. 그런데 어머니랑 떨어져서 시설에 들어가 장애인들하고 같이 살게 되니까 정말 못살 것 같더라고요. 한 달 후에 어머니가 면회를 왔는데 그때 어머니를 붙잡고 “여기서 사느니 죽어야겠다. 같이 죽자”고 애원하고 그랬죠. 그러니 어머니가 면회를 못 오고 멀리서 날 보고 가셨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렇게 거기서 버틸 수밖에 없었고, 처음으로 단체생활을 하면서 강해지고 똑똑해지지 않으면 항상 밑바닥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거죠.


성세재활학교에서 바이올린으로 음악을 시작하셨다고요.


농악하고 노래를 먼저 시작했어요. 당시 이사장님이 10명을 모아서 노래와 농악을 가르쳐 한 달간 일본 순회공연을 보내주셨는데 그때 눈이 확 떠졌죠.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떻게 해야 선진국에서 저 사람들처럼 살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한 여자 선생님(강민자 교수)이 재능기부를 하겠다고 찾아오셨어요. 우연히 지나가시다가 아이들이 운동장을 기어다니면서 노는 것을 보시고 ‘저 아이들에게 무엇인가 해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오신 거예요.

그 때 바이올린 켜는데 너무 좋아서 취미가 됐죠. 하지만 당시 음악이 직업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중학교 졸업 즈음 성세재활학교에서 5명의 학생들을 일본 태양의 집(장 애인들이 일하며 생활할 수 있게 설계된 공동체 형태의 도시)으로 1년간 연수를 보냈어요. 선진 기술을 배워와 한국에서 공장을 세워 다른 장애 아동들에게 가르치라는 의미였죠. 그런데 열심히 기술을 배워왔는데 그 기술들이 너무 첨단이라 한국에 그 기술들을 활용할 공장이 없는 거예요. 당시 한일 경제상황은 40년 정도 차이가 났거든요.

우리가 공장을 세우고 기계를 설치할 수도 없고. 그 때 일본에 갔다 온 세 명의 학생이 계속 바이올린을 하고 있었고, 기술을 활용할 길이 없으니 ‘정식으로 음악을 해보자’라는 생각으로 목원대에 청강생으로 들어가게 됐어요. 그리고 그곳에서 또 한 분의 남자 선생님(고영일 선생님)을 만나게 됐죠.

당시 그 분이 현악4중주단 결성을 권해서 창단하게 된 거예요. 제가 비올라로 바꾸고 첼리스트 한명을 성세에서 영입해서 음악을 처음 시작하는 친구를 가르쳐 탄생시킨 현악4중주단이 1976년에 창단한 ‘베데스다’였던거죠. 그때 그 선생님이 우리를 위해 정말 헌신하고 봉사해주셨어요. 우리도 ‘음악 아니면 죽는다’는 각오로 선생님 말씀에 무조건 따랐고요. 남자 5명이 함께 살면서 하루 8시간씩 독하게 연습했어요. 그렇게 첫 연주회를 열었고 연주를 잘한다고 소문이 났죠. 한국이 솔로 연주에는 강한데 앙상블이 약하거든요. 당시에는 현악4중주단 자체도 드물었고요.


고(故) 정주영 회장님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된 것인가요?


당시 우리 소문이 서울까지 나서 정립회관 황연대 관장님 초대로 서울에서 데뷔연주를 하게 됐어요. 황 관장님이 연습실과 숙소를 마련해주셨고 당시 국내 유명 음악가 분들이 무료로 우리를 지도해주셨죠. 하지만 우리는 정식으로 음악 공부를 한 것도 아니고 음대를 나온 것도 아닌데다가 장애인을 꺼리는 국내 풍토 탓에 활동에 많은 한계가 있었어요. 그래서 유학을 가고 싶어 신시네티 음악대학에 테잎을 보내 1년간의 초청연수 허가를 받았지만 생활비를 마련할 길이 없었죠.

일단 세종문화회관에서 고별연주회 를 열었는데 고(故) 정주영 회장 남동생의 부인이었던 서울대 음대 장정자 교수께서 우리 음악을 듣고 감동을 받아 정주영 회장님께 특별히 부탁을 드려주신 것이죠. 그렇게 생활비 지원을 받게 되면서 6년간 유학할 수 있게 됐죠.

부인도 유학생활 중 일본에 여행을 갔다가 만나게 됐고요. 결혼도 정말 극적으로 하게 됐어요. 방학기간이었는데 혼자 일본에 여행을 가게 됐어요. 그때 일본인 친구가 날 위해 마련한 파티에서 그 언니를 만나게 됐거든요. 그런데 막상 파티에서는 한마디 말도 못했어요. 그런데 그 다음날 다른 도시로 떠나는데 동생이 언니 명함을 건네더라고요. 그 뒷면에는 연락처가 적혀 있었죠. 이동하면서 제가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겠어요. 도착하자마자 전화를 걸었죠. 그랬더니 첫마디가 ‘내가 전화를 할 것 같았다’고 하더라고요. 속으로 쾌재를 불렀죠.

그때부터 일주일간 매일 연락을 했고, 한국에 간 이후에는 테이프 양면을 가득 채워 녹음을 해 보내고 한 달을 그렇게 연락을 했죠. 그때 제가 29세 부인이 30세였어요. 그러다가 부인이 한국에 온다길래 약혼을 하자고 했죠. 한 달 만이었어요. 자신감이 넘쳤죠.

그런데 알고보니 부인이 한 달간 부모님과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고 냉랭하게 지냈다고 하더고요. 이해가 가죠. 딱 한 번 만난 조센징(한국인을 낮잡아 부르는 표현)에 장애인 그리고 수입이 없는 학생에게 어느 부모가 딸을 주고 싶겠어요. 그래서 제가 일본에 가서 장인께 “우리는 어린애들이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 를 판단할 수 있는 충분한 나이입니다. 연애 기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 저는 장애인으로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불편해서 안경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도 불편해서 휠체어 타는 것입니다. 휠체어 탔다고 전 세계 안 다녀본 곳도 없습니다. 학업을 마칠 때까지만 고생해주면 남은 일생을 제가 책임지겠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리고 결혼을 강행했죠. “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다 ‘구라’였던 것 같아요. 평생 고생을 너무 많이 시켰어요. 정말 미안하고, 저는 다시 태어나도 우리 부인 다시 만나 결혼하고 싶어요.


장애인들이 피해의식이 강하고 의지가 약한 경우가 많은데 그런 핸디캡을 모두 극복하신 것 같아요. 그 노력과 끈기가 정말 대단하십니다.


저보다 훌륭한 분들이 정말 많아요. 저는 강인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여있었던 것이고요. 그러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겠죠. 하지만 이제는 과거와 환경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이제 장애는 무기가 아니에요. 장애를 무기로 삼아서 떼쓰고 그런 경우가 있었는데 장애인 스스로도 장애를 대하는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해요. 나도 장애인이라서 더 잘나고 더 독똑해야 한다는 오기는 있었죠. 그 오기가 피해의식일 것이고. 하지만 내가 장애인이라는 것은 피할 수 없어요. 어딘가 불편해 보이고 객관적으로 일반인보다는 부족해 보입니다. 그 부족한 점을 인정해야 하죠. 어떤 장애인은 그런 편견에 화를 내고 장애를 무기로 삼을 수도 있죠. 그런데 그러면 안된다고 봐요. 서로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고 배려하며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가야 합니다.  비장애인이 장애인에 공감하는 것이 쉽지 않겠지만 생각 해보면 우리는 모두 예비 장애인이거나, 장애인 가족이에요. 나이 들면 걷기 힘들어지고 지팡이 짚다가 휠체어 타게 되죠.


처음에는 눈이 좋았겠지만 불편해지면서 안경을 끼는 것처럼요. 누구나 거치는 과정이에요. 단지 나는 조금 어려서 겪은 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나라 등록장애인이 5% 정도인데, 실제로는 10% 정도 돼요. 굉장히 많은 숫자죠. 요즘은 법이 바뀌어서 새로 지어지는 집들은 장애인이 이동하기에 편리하게 설계되어 있는지 그 지역 장애인 협회에서 반드시 검수하게 되어 있어요. 휠체어뿐 아니라 유모차도 계단이나 건물에 턱이 있으면 운행이 힘들어요. 모두를 배려하는 유니버설 디자인이 대중화되고 모두가 편안한 사회를 만든다는 생각으로 서로 어려운 점을 이해하면 서로 어울리면서 함께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이란?

성별, 연령, 국적, 문화적 배경, 장애의 유무에도 상관없이 누구나 손쉽게 쓸 수 있는 제품 및 사용 환경을 만드는 디자인을 의미한다. 미국ㆍ대만ㆍ일본에서는 ‘보편적 디자인’, 북유럽 에서는 ‘모두를 위한 디자인(design for all)’, 영국에서는 ‘인 클루시브 디자인(inclusive design)’이라고 한다. 유니버설 디자인의 대표적인 예로는 휠체어를 탄 승객이 편하게 오르내릴 수 있는 저상버스가 있으며, 그밖에도 계단을 없애고 오르막을 설치한 건물 입구, 시각장애인을 위한 오디오북 등을 또 다른 예로 들 수가 있다. 이렇게 디자인된 도구, 시설, 설비 등은 장애가 있는 사람뿐 아니라 건강한 사람들 에게도 유용하게 사용된다.

 

  • 베리어 프리(barrier free)란?

고령자나 장애인들도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물리적· 제도적 장벽을 허물자는 운동.  1974년 국제연합 장애인생활환경전문가회의에서 '장벽 없는 건축 설계(barrier free design)'에 관한 보고서가 나오면서 건축학 분야에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선진국을 중심으로 휠체어를 탄 고령자나 장애인들도 비장애인과 다름없이 편하게 살 수 있게 하자는 뜻에서 주택이나 공공시설을 지을 때 문턱을 없애자는 운동을 전개하면서 세계 곳곳으로 확산 되었다. 2000년 이후에는 제도적〮법률적 장벽을 비롯해 각종 차별과 편견, 나아가 장애인이나 노인에 대해 사회가 가지는 마음의 벽까지 허물자는 운동의 의미로 확대 사용되고 있다.
 


발행처│한국여성언론협회  |  발행인 : 박영숙 (여성시대 미디어그룹 회장)  |  등록번호 : 서울 중, 라00702  |  본사 편집국 : 서울시 중구 삼일대로 301 영미빌딩 8층 전관
대표전화 02 – 786 – 0055  |  팩스 02 - 786 - 0057  |  총괄편집국장실 : 서울시 영등포구 국회대로 72길 11 (여의도동) 프린스텔 빌딩 907호
제보 (문의) 02 – 780 - 7816 | (재)창간등록일 : 2015 – 03 - 22  |  여성시대 미디어그룹 운영위원회 상임위원장 : 최금숙 (한국여성단체협의회 회장)
회장 : 고시환  |  사장 : 이재희 (지구촌선교회 이사장)│주주대표 : 송강면 박사 외 2인 | 명예회장 : 송태홍
일본어판 총괄책임 : 미야모도 마사오(宮本正雄)   |  총괄편집국장 : 하태곤  |   취재본부장 : 추현욱  |  청소년보호책임자 : 하태곤
여성시대의 모든 콘텐츠(영상, 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에 따라,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Copyright © 2019 여성시대.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ndsoft.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