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청춘스타 ‘故 신성일’! 그를 추억하다
  • 이정철 기자
  • 승인 2019.05.02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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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같은 삶을 따라가는 추억여행

 

 

영화 '맨발의 청춘'(1964), 택시에 무작정 올라타, 또 무작정 날리는 첫 데이트 신청. "집에 돌아가지 않으면 안됩니까?" 55년 전, 영화 '맨발의 청춘'은 청춘 영화의 대명사였다. 서울 인구 200만 명이던 시절, 영화관 한곳에서 25만 명이 봤고. 그 영화엔 최고의 청춘스타 신성일씨가 있었다.

은막의 스타, 청춘의 아이콘 신성일

1960년대, 한국 영화는 굉장한 전성기를 이루었다. 가난하고 어렵던 시대였지만 무엇보다 영화에 대한 사랑이 꽤 깊었던 시대였다. 당연히 은막의 스타는 국민적인 우상이었고, 서울인구 200만명에 불과하던 시대에 연 1억명의 관객이 영화관을 찾았을 정도였으니. TV가 보급되기 전의 시대, 영화보기는 거의 문화를 즐기는 사람들의 일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성일씨는 195726401의 경쟁률을 뚫고 신필름 오디션에 합격해, 1960년 신상옥 감독의 로맨스빠빠에서 둘째 아들로 데뷔했다. 이때 신상옥, 최은희 부부가 강신영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던 그에게 (새로울 신), 스타(별 성), 넘버원(한 일)’이라는 의미로 신성일씨의 예명을 지어주었는데,

그랬던 그가 1964맨발의 청춘을 통해 그야말로 당대를 대표하는 청춘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것이다.

요즘은 우리가 미남미녀의 표준을 우리나라 배우, 가수들에게서 찾지만 과거엔 서양 연예인을 미의 표준이라고 생각했다. 그 시절에 미남의 표준이라고 흔히 거론됐던 사람이 알랭드롱인데, ‘신성일씨가 바로 한국의 알랭드롱이라고 불렸다. 그만큼 한국을 대표하는 미남으로 인정받았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맨발의 청춘으로 상처 받고 좌절하는 젊은이를 연기해 청춘을 상징하고 시대를 위로하는 국민배우가 되었다.

1964년부터 1971년까지 8년간 한국영화 개봉작 1194편 중 324편에 그가 출연했을 정도로 영화계에서 절대적인 위상이었는데, 그가 신상옥, 김수용, 이성구 등 한국을 대표하는 유명 감독들과 꽤 많이 작업을 했으니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강명화(67)' '안개(67)' '내시(68)' '청춘극장(67)' 60년대 최고의 작품부터, 70년대 별들의 고향(74)’, ‘태백산맥(75), '왕십리(76)’겨울여자(77)’ 같은 전설적인 히트작들을 만들어 내었고, 80년대엔 임권택 감독의 길소뜸에 출연하기도 했다. 주연작만 무려 507편이고 상대 여배우가 연 119명에 달하는 이 시대의 진정한 대배우였다.

영원한 동지 엄앵란

신성일씨는 엄앵란 씨와의 부부관계로도 유명하다. ‘로맨스빠빠로 만나 1964맨발의 청춘으로 당대 최고의 스타가 된 이들은 바로 그해 1114, 워커힐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하객 수가 34백 명에 달할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 그야말로 대혼란 사태가 터진 세기의 결혼식이었다. 그러나 행복한 부부생활이 아니었고, 최근 들어 엄앵란 씨가 주부토크쇼에서 한풀이 토크를 하는 배경이 되었다.

하지만 엄앵란 씨가 유방암으로 쓰러지자 신성일씨가 달려와 병간호를 하였고, ‘신성일씨가 폐암으로 쓰러지자 엄앵란 씨가 병원비를 대며 보살폈다. 요즘 신세대 감각으론 이해할 수 없는 애증의 유대관계가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자신들의 부부관계를 엄앵란 씨는 동지적 관계라 표현한다.

내가 존경할만한 사람이라 55년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엄앵란 씨의 말이다. 방송에선 신성일씨를 향해 험담을 많이 했지만 그래도 신성일씨 존재에 대한 존중이 기본적으로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신성일씨는 20여 년 간이나 시대를 대표했던, 앞으로 다시 나타나기 어려운 대스타로써 그 시대를 함께 한 이들 사이에선 신성일씨에 대한 존재감이 엄청나다. 이러한 거목이 201811월 우리들의 곁을 떠났고,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수고했고, 고맙다. 미안하다 그래라엄앵란 씨에게 전해달라며 신성일씨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입니다.

마지막까지 영화만 생각한 진정한 영화인

신성일씨는 마지막까지 영화만 생각했다고 한다. “까무라쳐서 넘어가는 순간까지 영화 생각만 했다고 하고, 음식을 먹을 때도 이걸 먹어야 촬영을 할 수 있다고 말했었다뼛속까지 영화인이었다고 엄앵란 씨는 전했다. 특히 김홍신 원작의 영화를 내년에 제작할 계획까지 다 세워놓은 상태였다고 한다.

신성일씨는 이 외에도 60년대에는 한국영화계에 필름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필름공장을 건립하려다가 사기를 당해 1억원을 날리기도 하는 등 인생의 우여곡절 속에서도 영화를 위해 헌신 했다. 배우로서의 전성기가 끝난 후엔 영화규제제도를 영화계에 유리하게 만들겠다며 정계에 도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81년 선거 패배로 엄청난 빚을 지게 됐고 엄앵란 씨가 식당을 경영하며 가정을 돌봐야 하는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기도 했다. 그 후, 2번 더 도전해 마침내 2000년에 국회 입성했지만 불법 정치후원금으로 2년여 간 수감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감옥에서 베토벤의 삶과 음악 세계를 읽고 말년의 그를 대표하는 스타일인 파마머리를 선택하게 되었다고 한다. 실패로 끝난 정치 외도 후, 그는 영화에 열정을 불태우며 내년 부산국제영화제 출품작 계획까지 세웠지만 결국 병마에 쓰러지고 말았다.

한국영화박물관에서 신성일씨를 만나다.

이렇게 한 시대를 풍미한 우리들의 청춘스타 신성일씨를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마포구 한국영화박물관에서 44일부터 630일까지 청춘 신성일, 전설이 되다를 주제로 기획전시를 개최한다이곳에서 신성일씨의 일생이 담긴 사진, 영상, 트로피 등을 전시함은 물론은막의 황금 콤비로 불리었던 신성일씨와 엄앵란 씨의 1964세기의 결혼식관련 이미지 영상도 볼 수 있다.

 

개봉 당시 서울 관객 25만명을 동원하며 청춘 영화 결정판으로 불린 맨발의 청춘’(김기덕·1964) 속 서두수(‘신성일’) 씨의 방도 재현되었으니. 이 영화를 기억하시는 분들은 오셔서 추억여행을 한 번 떠나는 것도 좋은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이 외에도 1963년에서 1968년까지 신성일씨가 출연한 주요 청춘 영화 포스터 35점도 전시되는데, 문희, 윤정희, 남정임씨의 여배우 트로이카신성일씨가 동반 출연한 작품도 사진과 영상으로 만나볼 수 있다.

 

영화를 그 누구보다 사랑한 이 시대의 진정한 영화인 신성일. 그가 사랑한 영화를 통해 우리는 울고 웃을 수 있었다. 그 시대를 살았던 만인의 추억에 남아있는 그의 삶이야말로 정말 한 편의 영화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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