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혹한 위안부, 일본인의 용기 있는 증언
  • 최경현 기자
  • 승인 2018.09.13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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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중일전쟁에 참전했던 故곤도 하지메( 根本 長寿 )의 손자 네모토 마사루( 根本 大 )는 위안부 문제 등 일본이 무엇을 했는지 있는 그대로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개인 블로그를 만들어 위안부에 대한 증언 등 여러 자료를 올리고 있다. 지금도 대부분의 일본 참전 군인들은 위안부 경험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보수적인 일본 사회에서는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네모토 마사루는 “매스컴만으로는 위안부가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할아버지와 식사를 할 때 전쟁 이야기가 나와서, 위 안부가 사실이냐고 묻자 사실이라고 대답했죠. 저는 그때 정말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 할아버지가 위안부 경험자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으니 까요.” 곤도 하지메는 위안부 증언 이후, 지난해인 2017년 4월, 97세의 나이로 작고했다. 네모토 마사루가 운영하는 홈페이지는 현재도 일본군 ‘위 안부’ 사실을 증언할 수 있는 다양한 자료를 수집, 공개 하고 있다. 치욕적이고 슬픈 우리나라의 역사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으로 참전했던 일본인들의 목소리로 들어보자.

“죽은 사람은 돼지 사육장에 던져 넣었습니다. 인간의 존 엄을 하나도 생각하지 않은 거죠. 어째서 그런 인간이 되어 버렸을까?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질러 버렸다고, 뉘우치고 뉘 우칠 수밖에 없었지요. 그때 일은 5, 60년이 지나도 제 머리 속에서 지울 수 없습니다. ‘전쟁’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면, 전 쟁만은 절대로 다시는 안 된다고, 그런 마음으로 지냅니다.”

- 곤도 하지메( 根本 長寿 ) / 1940년 중일전쟁참전, 치치하얼 주둔지

“군인전용 삐야(위안소)는 훈춘 마을 곳곳에 있었다. 그 중 한 곳에는 조선여자 수십 명이 있었다. 아주 어린 여자도 섞 여 있었다. 여자들은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먼 곳까지 왔지 만, 깨달았을 때는 돌아가지도 못하고 굶주린 군인들의 먹이 로 몸을 낼 수밖에 없었다.

짐승처럼 변해 버린 군인들은 일요일도 아랑곳없이 찾아 왔고, 여자들은 조금도 쉴 수 없었다. 일이 채 끝나기도 전 에, 다음 차례를 기다리던 군인이 문을 두드리며 재촉했다. 생리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베니어 판자로 지은 작은 방에는 빈약한 화장대와 트렁크가 있었고, 그게 그녀들의 전재산이 었다. 얇은 이불이 덮인 침대 시트는 아주 더러울 뿐 아니라, 마치 수술대처럼 피가 어마어마하게 묻어 있었다.”

- 중국 동북부의 길림성 훈춘시 주둔 제733부대 일병의 기록 / 「우리와 전쟁 체험 문집」 출판 : 타임스, 1977년 p.32

“아침에 도착한 화물선에서 조선 여자 4, 50명이 상륙했다고 들었다. 그녀들의 숙소에 갔을 때, 내 상대는 23살의 여성으로 일본어가 능숙했다. 학교에서 선생님을 했다고 말 했다. “학교 선생님이 왜 이런 곳에 온 거요?”라고 묻자, 그녀는 무척 억울해하며 대답했 다. “우리는 속았다. 도쿄의 군수 공장에 간다는 모집이 있었고, 도쿄에 가고 싶어서 지 원했다. 인천 앞바다에 정박해 있던 배에 승선했더니, 도쿄에는 가지 않고 남으로, 남으 로 가서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거기서 절반이 내렸고, 나머지는 버마로 왔다. 걸어서 돌 아갈 수 없으니 나는 포기했다. 다만 불쌍한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들이다. 16, 17살 된 소녀가 8명 있다. 여기가 싫다고 계속 울고 있다. 도울 방법이 없겠는가?”

나는 고심 끝에 헌병대에 호소하는 방법을 알려줬지만, 헌병이 과연 그녀들을 도울지 자신이 없었다. 고심 끝에 8명의 소녀들은 헌병대에 구원을 요청했고, 그녀들을 장교클 럽으로 보냈다. 그러나 장교클럽 역시 결코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것은 전쟁터의 상식 이다. 이후 장교들이 그 소녀들을 어떻게 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오마타 유키오( 小俣 行男 ) 「전장과 기자 -중일 전쟁, 태평양 전쟁 종군기」
출판 : 冬樹社 1967년 / 1942년 5월경 버마 ‘요미우리신문’의 종군기자 오마타 유키오의 기록

“수마트라 최북단에 ‘코타라쟈’라는 마을이 있다. 우리가 처음 주둔한 군인들이었고, 이곳에 일본군 위안소가 있어, 조선 여자 20명 정도가 강제로 접객을 당하고 있었다. 모두 스무 살 안팎으로 보이는 농촌 출신 사람들로, 철조망이 둘러쳐진 위안소 건물 안에 살며 도망치지 못하도록 감시당하고 있었다.”

“위안부에 있던 조선 여인의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조선의 농촌은 가 난했는데, 일본 본토의 공장 노동자로 취직시켜 준다며 일인당 20엔(한 국돈 200원)씩 선급금을 주고 속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배를 타 보니, 일 본이 아닌 남방으로 끌려갔고, 게다가 갑자기 일본군 장교에게 억지로 강간당했다고 원통해하며 울었다. 얼마 후 농촌의 야자숲 속에 또 다른 위안소가 만들어졌다. 여기에는 인도네시아의 젊은 여성이 열 명 정도가 수용됐다. 이 사람들도 자바섬 의 농촌에서 조선 여성과 유사한 방식으로 오게 됐다며 역시 울었다.”

-「‘이런 날들이 있었다’ 전쟁의 기록」 출판 : 上越よい映画を観る会 1995년 스도오 유우 자부 로우( 須藤友三郎 ) ‘인도네시아 에서 본 침략 전쟁의 실태’
1943년 이후 북부 수마트라에 있었던 병사기록 / 코타라쟈의 위안소.

“내가 거기에 갔을 때, 소녀 3, 4명이 모여 다양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조선에서 온 소녀들은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속아서 왔다고 했다. 해군병원의 허드렛일을 하면, 30엔(한국돈 300원) 정도의 월급에 숙식을 제공해 준다고 해서 1년 정도만 일하고 돌아가려고 했다고 한다. 어떤 이는 자식과 남편을 두고 왔다며 울 면서, 이곳에 끌려와 마음이 찢어진다고 말했다. 소녀들은 하루에 10명씩 상대한다며, 내가 해군 시설부 직원인데다(전장에 나가는 군인이 아니라 안심한 것 같다) 신경을 써서 이야기를 들어주니, 용기 내 이것저것 말해 준 것 같다.

나츠섬 위안부에는 대부분 조선 여성이 있었다. 나는 이모가 조선분과 결혼한 데다, 학생 시절 조선인 친구도 있어서 조선인에게 더욱 특별한 감정이 있었지만, 도움을 줄 수 없어 무척 가슴이 아팠다.”

-「바다를 건너는 400년의 기억」 출판 : 도서신문 2011년
1942년 제 4해군 시설부, 나츠시마( 夏島 )에 파견된 군 기록

“일본은 조선의 소녀들 수만 명을 강제적으로 위안부로 삼고 죽이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아무리 사죄를 하거나 아무리 배상을 하여도 영원히 용서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네모토 마사루(根本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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